[횡설수설/정임수] 슬로벌라이제이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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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1월 17일 김영삼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직후 호주 시드니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국정목표를 ‘세계화’에 두겠다고 선언했다. 세계화에 대한 개념조차 생소해 “국제화를 세게 하면 세계화가 된다”는 말이 나오던 때였다. 한국뿐 아니라 냉전이 종결된 1990년 이후 세계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세계화) 물결이 거셌다. 미 하버드대 경제학자 시어도어 레빗 교수가 1983년 처음 사용한 글로벌라이제이션은 경제를 넘어 정치 사회 교육 문화 전반의 패러다임 변화를 이끌었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세계화의 동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이는 통계지표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국경을 넘나드는 재화·서비스 교역량은 2008년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 대비 61%에서 지난해 58%로 줄었다. 국가 간 은행대출도 2006년 60%에서 지난해 36%로 급감했다. 금융위기 무렵부터 지난해까지 무역·투자·인력 교류 등 12개 세계화 연관지표 중 8개에서 세계화 수준이 후퇴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세계화 둔화 현상을 ‘슬로벌라이제이션(Slowbalization)’이라고 명명했다. 느린(slow)과 글로벌라이제이션의 합성어다.

▷미국을 필두로 자국 우선주의와 통상 마찰이 확산되면서 세계 경제 질서에 균열이 생긴 결과다. 연초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이 ‘세계화 4.0’을 화두로 던진 것도 같은 이유다. 보호무역주의에 맞서 새로운 글로벌 협력 체제를 모색하자는 취지였다. 슬로벌라이제이션에 따라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다자주의 채널이 힘을 잃고 있고 자유무역협정(FTA) 등 양자협력도 보호무역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됐다. 미국이 이끄는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에 맞서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등이 설립되는 등 국제기구 분화 움직임도 뚜렷하다.

▷슬로벌라이제이션 시대에 대한 전문가 진단은 비관적이다. 달러화를 중심으로 구축된 국제금융 시장이 균열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위기가 생길 수 있고 저숙련 노동자의 실직, 난민 갈등 같은 세계화가 낳은 문제도 해결이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처럼 대외 환경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일수록 불리하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최근 슬로벌라이제이션을 연급하며 “무역 의존도가 높고 내수 기반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신흥국 경제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고 했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이 본격화되기 전에 ‘중진국 함정’에 빠진 우리 경제를 도약시킬 해법을 서둘러 찾아야 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apec#세계화#금융위기#슬로벌라이제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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