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25시/최우열]야당과 청와대 민낯 드러낸 ‘한미정상 통화 유출 사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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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 통화 내용을 누설해 논란에 휩싸인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 더불어민주당은 강 의원을 검찰에 고발하고 한국당에 의원직 제명을 요구하고 있다. 페이스북 캡처
한미 정상 통화 내용을 누설해 논란에 휩싸인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 더불어민주당은 강 의원을 검찰에 고발하고 한국당에 의원직 제명을 요구하고 있다. 페이스북 캡처

최우열 정치부 기자
최우열 정치부 기자
“예전에는 폭로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는 하지 않았는데….”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폭로한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의 정보원을 청와대와 외교부가 색출해 징계 절차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한국당 안팎에선 이전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강 의원 폭로 이후 단 13일 만에 정부 내 소스가 쉽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 당직자는 “강 의원이 외교 기밀인 한미 정상 통화 관련 정보를 너무 거칠게 다뤄 (나중에라도 정보를 받을 수 있는) 귀한 ‘휴민트’를 잃었다. 정보 취득에서 폭로까지 프로페셔널한 구석을 찾을 수 없다”고 혹평했다. 구체적으로는 강 의원이 고교 후배 외교관과 직접 접촉해 통화 기록을 남긴 것, 내용을 자르거나 붙이는 등 가공 없이 풀 텍스트를 줄줄이 공개했다는 점, 외교 기밀인 만큼 후속 논란에 대한 고려도 별로 없는 점 등을 문제 삼았다. 또 다른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겠다는 노력은 좋은데 프로페셔널한 측면이 별로 없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면 지지층도 우리를 아마추어 야당으로 볼 것”이라고도 했다.

한국당이 야당이던 2000년 전후에는 지금보다 폭로가 더 많았다.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 정보통 의원들은 매일같이 ‘비(秘)’자가 찍힌 누런 봉투를 들고 이회창 총재실을 드나들기도 했다.

그때 폭로들을 보면 요즘 정치권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 적지 않다. 1999년 국가정보원 언론 장악 문건, 김대중 대통령 친인척 및 벤처 비리 의혹, 2002년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 관련 청와대 개입 도청 자료, 2003년 송두율 관련 대북 보고문…. 종종 정권 자체를 흔드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폭로에 관여했던 의원 중 일부는 “구시대적 네거티브 캠페인의 온상”이라는 평가와 함께 정치권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 물갈이가 거론되면 이들은 늘 맨 앞에서 거론됐다. 하지만 “강한 야당을 만드는 구심점이었다”는 평가도 없지 않았다.

야당의 사정은 그렇다 치고, 공직자 정보원을 빨리 색출해낸 지금 정부와 청와대는 이전보다 과연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사건 직후 기자와 만난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외교 대화를 공개한 강 의원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동시에 청와대·여당의 잘못된 관료관(官僚觀)도 지적했다. 외교부 차관 출신으로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낸 천 이사장의 말은 이랬다.

“요즘 외교부 선후배 간에 전화 한 통도 제대로 못 한다. 오랜만에 귀국한 친한 후배를 우연히 만나면 주뼛거리며 ‘찾아뵙지도 못해 미안하다’고 한다. 나는 후배에게 ‘괜히 통화기록 남겼다가 적폐로 찍히지나 말아라.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위로한다.”

그는 외교부 공무원들만 해도 15차례 이상 휴대전화 조사를 당했다는 얘기에 대해선 “이 정도면 공무원이 복지부동하는 것 외에 무슨 일 자체를 못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와 김수현 대통령정책실장이 말한) ‘관료들이 이상한 짓’ 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라고도 했다.

야당의 폭로도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정치를 투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강 의원의 폭로 내용과 절차는 그러했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동시에 청와대와 외교부는 이번 유출 사건을 외교관 개인의 일탈로만 볼 게 아니라, 이 정부 들어 관료 조직이 왜 이리 됐는지 그 배경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출범 직후부터 지금까지 대통령이 나서 공직사회를 겨냥해 중단 없는 적폐청산을 외치고 있는데, 그러지 않아도 복지부동이 체질화됐다는 비판을 받는 공직사회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 아닐까 싶다.

최우열 정치부 기자 dns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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