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피해 예방-보상 매뉴얼 급한데… 여름 지나면 논의 흐지부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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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년 만에 최악 폭염]‘폭염 대처 입법’ 여론 높아져


폭염을 재난으로 규정해 국가 차원에서 대응책을 갖추자는 내용의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 개정안이 20대 국회에서만 9건이 발의됐지만, 정부 반대와 정치권의 무관심으로 방치된 걸로 나타났다. 비슷한 법안이 2005년 6월 17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된 걸 감안하면 13년째 정부와 국회 모두 폭염에 대한 제도적 대처 마련에 뒷짐을 지고 있었던 셈이다.

1일 국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자유한국당 이명수 의원 등이 발의한 9건의 재난안전법 개정안과 민주평화당 천정배 의원이 발의한 ‘기후변화에 대응한 국민건강관리에 관한 법률안’은 모두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해당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정부가 심사 과정에서 “폭염과 폭염 피해 사이에 인과관계 규명이 어렵다”며 입법에 반대한 데 따른 것이다.

정부는 지난달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폭염을 특별재난 수준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한 이후에야 뒤늦게 법을 고치겠다고 태도를 바꿨다. 1일 서울의 낮 최고기온이 39.6도까지 올라 관측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전 지구적 기후변화로 폭염 피해가 급증하는데 국회와 정부가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 정부, 폭염 입법 번번이 반대

“폭염 기준이나 피해 지원 기준을 정하기 어렵습니다. 법안에 폭염을 추가하는 건 곤란합니다.”(장인태 행정자치부 2차관)

“폭염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든지 이러면요?”(강창일 의원)

“폭염만 갖고 (사망의) 직접 원인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법에 들어가면 다른 재난처럼 보상 문제도 일괄적으로 해야 해 우리나라에선 시기상조입니다.”(장 차관)

2006년 9월 14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법안심사 소위.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이성권 의원이 1년여 전 발의한 재난안전법 개정안을 놓고 찬반 토론이 벌어졌다. 폭염에 대한 피해자 보상과 국가 차원의 대응을 규정한 첫 법안이었다. 그러나 주무 부처인 행자부 반대로 법안은 결국 폐기됐다.

마치 도돌이표를 보듯 10여 년이 흐른 현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주무 부처는 같은 이유로 입법을 반대했다. 김두관 의원 등이 발의한 재난안전법 개정안 3건에 대해 류희인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은 지난해 8월 28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위에서 “폭염은 개인 건강이나 주변 환경에 따라 피해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 원인 규명이 어렵다. 현재는 수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부 주장이 사실과 다른 측면이 있다고 반박한다. 폭염과 폭염 피해의 인과관계는 이미 숱한 연구 결과를 통해 충분히 입증됐다는 것. 김해동 계명대 교수(지구환경학)는 “폭염에 따른 온열질환 등 피해 인과관계는 이미 국내외에서 연구가 많이 돼 있다. 폭염이 재난이라는 걸 증명하는 건 너무 쉽다”고 했다.

○ 폭염 길어지며 입법 움직임 활발


폭염 대책 입법이 지지부진한 것은 국회가 정부의 반대 논리를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한 데도 책임이 있다. 재난안전법 개정안을 처음 발의했던 이성권 전 의원은 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전례가 없어 해외 입법 사례를 참고해 법안을 내놓았지만 동료 의원들이 별 관심이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여름만 지나면 폭염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식는 것도 국회의 입법 의지에 영향을 줬다. 민주당 관계자는 “여름이 지나면 자연스레 폭염 이슈가 묻혀 의원들이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올해는 폭염이 예년보다 장기화하며 관련 입법 움직임이 활발하다. 권칠승 민주당 의원은 1일 폭염을 재난으로 규정하고 복구계획 수립 때 재난 예방을 위한 기반시설 설치 등 중·장기 계획을 포함하도록 하는 내용의 재난안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이날 폭염 재난이 발생한 달에 모든 주택용 전기요금을 30% 감면해주는 내용의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 온열질환 실제로 연평균 1만7000여 건

“요즘 생활지도사들은 홀몸노인 자택을 방문할 때마다 폭염 때문에 쓰러진 어르신들 시신을 볼까 두렵다는 얘기를 자주한다.”(김정민 서울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

“최근 구토 증세를 호소하거나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는 어르신이 늘고 있다.”(손연서 세종시 응급관리요원)

국회와 정부의 폭염 대책 입법 방치 속에 냉방 기구를 충분히 사용할 형편이 못 되는 저소득층의 피해는 점점 커지고 있다. 폭염 때문에 홀몸노인의 집에 설치된 활동 감지기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일도 잦다. 손연서 응급관리요원은 동아일보에 “전기료를 아끼려고 선풍기를 안 틀다 보니 방 안 온도가 35도까지 치솟은 집도 있다”고 했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에 따르면 2012∼2015년 국민건강보험공단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온열질환 발병 건수는 연평균 1만7713건. 이는 같은 기간 질병관리본부가 샘플조사 방식으로 조사해 발표하는 공식 통계인 연평균 846건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두 기관 사이에 이처럼 큰 차이가 생긴 건 조사 방식 때문이다. 건보는 전수 조사인 반면, 질병관리본부는 특정 병원을 샘플로 조사하기 때문에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 실제로는 정부의 공식 발표 수치보다 폭염으로 인한 피해가 훨씬 더 많다는 얘기다.

김상운 sukim@donga.com·박효목 기자
박강수 인턴기자 성균관대 철학과 4학년
#폭염#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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