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마전’ 지방의회]<下>정당공천제에 멍드는 지방자치

  • 입력 2008년 7월 30일 02시 58분


국회의원 눈도장 찍느라 의정은 뒷전

지방의원 공천권 쥔 국회의원과 ‘부적절한 공생’

기초長 78% “정당공천 폐지를”… 국회선 미적미적

‘다수당 담합 → 낙점’ 의장 선출방식도 혼탁 조장

광역시 국회의원 A 씨의 지역구 행사가 열린 5월의 어느 날. 공항 게이트를 통해 A 의원이 걸어 나오자 정장 차림의 두 사내가 잰걸음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뒤쪽에는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인사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된 차를 타고 A 의원이 떠나자 이들 역시 재빨리 자기 차를 타고 A 의원의 뒤를 따랐다.

이들은 A 의원 지역구의 시의원과 구의원들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 한대수(52) 씨는 “영화라도 한 편 찍는 줄 알았다”며 혀를 끌끌 찼다.



○지방의원들은 국회의원의 개인비서(?)

정도의 차만 있을 뿐 대다수 지역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회의원이 지역 행사에 나타나면 지방의원들은 눈도장 찍기에 바쁘다. 이는 국회의원이 지방의원의 ‘생사여탈권’, 즉 공천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공천제’의 대표적인 폐해다.

지방의원들이 총선 때 소속 당 출마 후보에게 선거비용을 대고,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국회의원은 대신 지방선거 때 공천으로 보상한다.

지난해 중반부터는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대선후보 경선과 대선(2007년 8월∼12월 19일), 총선(2008년 4월 9일), 시의회 의장 선거(2008년 7월)가 연달아 이어졌기 때문.

한 광역시의 시의원은 “상당수 시의원이 지역구 국회의원을 도와 각종 선거를 치르느라 임기 전반기를 거의 시의회 밖에서 보내다시피 했다”고 털어놨다.

지방의회 비례대표의 ‘임기 나눠 먹기’도 정당공천제의 부산물이다.

경기 파주시의회에서는 한 편의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시의회 정원은 10명인데 11명이 등원하고 있는 것. 사연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미애 의원은 2006년 지방선거 전 한나라당 파주지구당에 ‘(비례대표가 되면) 2년만 하고 2008년 6월 30일에 물러난다’는 자필 사직서와 인감증명서를 냈다.

2년이 지난 뒤 전 의원은 당시 사직서는 지구당의 지시였다며 의원직 사퇴를 거부했다. 그러자 시의회는 전 의원이 허위 학력으로 벌금 300만 원의 처벌을 받은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지난달 20일 의원 자격을 박탈했다. 그 자리는 최영실(한나라당) 의원이 승계했다.

하지만 전 의원은 징계처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의원직을 회복해 두 명 다 시의회에 등원하고 있다.

경기도의회, 경북 청송군의회, 전남 함평군의회 등 전국 곳곳에서 임기 나눠 먹기가 성행하고 있다.

○폐지 여론에도 정치권은 묵묵부답

기초자치단체장들과 정치권 일각에서도 이 같은 폐해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본보가 올해 실시한 기초자치단체장의 의식 조사 결과, 설문에 응한 214명 중 78%가 ‘정당공천제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17대 국회에서 이시종(민주당) 이상민(자유선진당) 의원 등은 2006년 이후 5차례나 지방단체장 및 기초의원들의 정당공천 폐지를 주 내용으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지난해에는 법무부까지 나서 법 개정을 건의했으나 결국 유야무야됐다.

18대에서도 김종률(민주당) 이명수(선진당) 의원 등이 6월 2차례에 걸쳐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세욱 한국공공자치연구원장은 “일부 국회의원이 정당공천제 폐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대다수 의원은 자신들이 수족(手足)처럼 부릴 수 있는 지방의원들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비민주적 의장단 선출 방식

의장을 비롯한 상임위원장 선출 방식도 지방의회의 혼탁을 조장하고 있다.

지방의회는 의장을 뽑을 때 후보자가 출마 선언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원 전체가 후보가 되는 ‘교황 선출방식’을 택하고 있다. 다수당 의원들이 담합하면 특정 후보를 의장으로 낙점할 수 있게 만드는 데는 이런 잘못된 선출 방식의 탓도 크다.

이 과정에서 의장 후보는 소속 의원들을 상대로 돈을 뿌리곤 한다. 선거 과정에서 동료 의원들에게 돈을 건넨 혐의로 구속된 김귀환 서울시의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울산대 유종선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교황 선출방식은 파벌이 없거나 담합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전제돼야 유효하다”며 “법 개정을 통해 공개 입후보와 정견 발표 등의 민주적 절차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울산=정재락 기자 raks@donga.com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공천심의위 만들어 국회의원 입김 차단을”▼

■지방의회 부패 막으려면

“의정비 4년에 한번만 올리고 인센티브 도입

집행부 감사조직 떼내 각 분야 전문가 영입”



지방행정 전문가들은 지방의원이 도덕적 해이와 각종 비리에 연루된 것은 의회를 견제할 제도적인 장치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중앙정치와 견줘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여론도 지방의회의 비리를 키웠다는 것.

임승빈 명지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당공천제 폐지 △의정비 개선 △감사의 전문성 제고 등을 지방의회의 개선 과제로 꼽았다.

특히 매년 이뤄지는 의정비 인상을 4년에 한 번씩 하도록 제한 규정을 두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방선거 2, 3개월 전에 의정비심의위원회를 열어 의정비 변동폭을 정한 뒤 차기 의원들에게 적용한다는 것. 과다하게 의정비를 올린 의원은 차기 선거에서 평가를 받는 구조다.

임 교수는 “의정비를 일반급여와 정책수당으로 나눠 인센티브 개념을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프로젝트 지원방식으로 정책 개발에 수당을 지원해 활동이 왕성한 의원에게 혜택을 주자는 것.

임 교수는 “지방의회가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집행부를 견제해야 한다”며 “집행부의 자체감사 조직을 떼어 의회 소속으로 감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각 분야 전문가를 영입하면 의회 감사의 전문성을 보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당공천제를 유지하되 따로 보완 장치를 마련하자는 의견도 제기됐다.

이상묵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정당공천제는 당초 취지대로 정당을 통해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순기능도 있다”며 “대신 지역구 국회의원이 기초의원 공천에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도록 제도적인 방안을 마련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수석연구원은 지역시민단체, 학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지방의원 공천심의위원회를 만들어 지역구 국회의원의 입김을 차단하자고 제안했다. 오관영 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은 지방의회를 장악한 기존 메이저 정당을 견제하는 유권자공동체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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