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을 듣자마자 배한성 성우가 떠올랐다면, 최소 중년 이상이지 않을까. 1980년대 후반 국내에서도 인기였던 미국 드라마 ‘맥가이버’. 추억에 잠겨보면, 금발의 주인공(리처드 딘 앤더슨)은 또박또박 한국말을 참 잘했다. ‘600만 불의 사나이’ 스티브 오스틴 대령이나 ‘X파일’ 멀더와 스컬리 요원처럼. 바야흐로 외화 더빙의 시대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더빙은 열등한 선택지로 취급받았다. 외국 작품은 자막으로 봐야 한다는 분위기가 굳어졌다. 더빙은 어린이 만화영화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실제로 글로벌 여론조사기관 모닝컨설트에 따르면 한국은 대표적인 ‘자막 선호 국가’다. 2022년 기준 약 75%가 자막 감상을 택한다.
그런데 최근 다시 더빙이 각광받고 있다.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공룡들’은 배우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으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국내에선 김기현 성우가 맡은 한국어 버전의 인기도 상당했다. 1987년부터 연재한 일본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 애니메이션의 첫 한국어 더빙판이 나온단 소식도 팬들 사이에선 꽤 뜨거운 이슈. 게다가 요즘 주요 게임들은 우리 말로 더빙하지 않으면 반감을 살 정도라고 한다.
AI가 이끄는 더빙의 부활
콘텐츠 더빙이 이리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일단 이 역시 인공지능(AI)의 파장이다. 유튜브는 지난해 각 언어에 맞춰 입술 모양까지 동기화하는 ‘더빙 AI’를 선보였다. 한국도 K콘텐츠 경쟁력을 위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AI 더빙 기술에 재원을 투입하고 있다. 기술이 흐름을 선도하는 모양새다.
여기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득세가 결정적이었다.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연구에 따르면 OTT가 비영어권 콘텐츠를 유통하며 이전까지 제한적으로 쓰이던 더빙을 ‘주류 번역 방식’으로 끌어올렸다. 드라마 등을 다언어로 동시 제공하며 더빙의 활용 가치를 높였단 뜻이다. 세계적인 히트작 ‘오징어 게임’의 경우, 미국 시청자 60% 이상이 영어로 대사를 들었다.
더빙은 요즘 세대 스타일에도 잘 맞는다. 로이터통신은 “현대인은 콘텐츠를 ‘집중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켜놓고 소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분석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미드 보는 이에게 작디작은 글자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러닝머신에서 뛰거나 산책할 때도 모국어로 듣는 게 훨씬 편안하다.
AI가 불붙인 산업적 변화는 직업의 부흥도 이끌고 있다. 라디오나 TV에서 자리를 잃어가던 성우들이 세계적으로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아무리 AI가 완벽하게 목소리를 입혀도, 인간의 미묘한 감정선까진 구현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AI 더빙이 발전할수록, 인간 더빙의 몫도 커지는 셈이다. 텍스트를 소리로 소비하는 시대
되돌릴 수 없는 변화도 감지된다. 세상은 점점 콘텐츠를 ‘정독’하지 않는다. 영상을 한곳에 머물며 보던 시절은 갔다. 틀어놓고, 주의력을 쏟지 않는다. 이러니 익숙한 자국어를 선호할 수밖에. 그런 맥락에서 더빙은 그나마 최소한의 몰입을 ‘유지하게’ 돕는 장치가 되고 있다.
물론 우려도 공존한다. 더빙은 원작이 가진 고유성을 망칠 수 있다. AI 더빙으로 조작이나 왜곡이 범람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하지만 시장은 벌써 방향을 정한 듯하다. 세계 AI 더빙 시장은 2023년 8억 달러(약 1조2000억 원)에서 2033년 30억 달러 수준으로 규모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제 텍스트는 영상 콘텐츠에서도 역할이 바뀌는 걸까.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으로 오스카를 석권하며 “1인치의 장벽(자막)을 넘어서면 더 큰 즐거움이 찾아온다”고 했다. 하지만 그사이 세상은 그 문장마저 소리로 소비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그게 길(吉)인지 흉(凶)인지 따져 볼 틈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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