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서울에서 살면서 스페인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일을 주로 하는 번역가를 만났다. 서른 살 정도였지만 고독하고 집요한 번역 노동의 특성 때문에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더 똑똑해 보였고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내 눈에는그랬다. 그래서 대화를 나누다가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던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소설가“한국어로 번역된 남미 문학 작품은 왜 이렇게 적은 거지요? 다른 나라에서는 스페인어 문학 작품들이 점점 더 인정받고 있는데 말입니다. 특히 사만타 슈웨블린이나 마리아나 엔리케스 같이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작가의 작품도 거의 없고요.”
그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이들의 작품은 한국어로 번역되긴 했지만,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했다. 저는 로베르토 볼라뇨가 떠올랐다. 사망한 후에 세계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은 이 칠레 작가의 작품은 한국에서 특별 컬렉션으로 나왔지만, 출판사마저 놀랄 정도로 판매 실적이 저조했다.
남미 문학은 한때 한국에서 민주화를 이끌던 세대에게 중요했으며 인기도 있었다. 한강 작가도 여러 인터뷰에서 1970년대 남미 소설이 작가로서 훈련하는 데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지금에 와서 남미 문학은 이렇게 인기를 잃게 된 건가요.” 나는 번역가에게 질문했다.
젊은 현자의 얼굴을 한 그는 자신도 사실 더 이상 스페인어 번역을 하고 싶지 않아 일본어 공부를 위해 도쿄로 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제 그런 책들은 한국인들에게 공감을 얻기 어렵다면서. 독재정권 아래에서 살아가는 가족 이야기, 가속화된 현대화로 인한 혼돈에 관한 이야기, 도시로 이주한 시골 사람들이 지닌 뿌리 깊은 믿음에 관한 소설들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사회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비롯된 문제보다 심리적이거나 정서적인 문제에 더 깊이 공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미 소설보다는 프랑스 소설이 더 인기를 끈다고 했다.
번역가의 대답은 내 말문을 막히게 했다. 이후 며칠 동안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뭐라고 대꾸했어야 하는데 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요즘, 현실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하는 것 같다. 계엄 선포, 다시 독재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에 직면했던 시간의 끔찍한 불확실성, 더욱 격렬해진 시위, 대통령의 체포와 완고한 갈등, 그 밖에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문제와 미신 논란까지 고전적인 남미 소설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 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문제가 단순히 개인의 심리나 정서에 관한 것에 국한돼 있지 않다는 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명백하나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먼 과거의 일부일 뿐이다. 한국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사회적인 시스템이 구축돼 가고 있더라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오래된 상처를 품고 있다. 콜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그리고 내전을 겪은 스페인까지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상처다. 즉, 많은 한국인이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1953년 이후 한국의 역사는 20세기 중남미 국가의 역사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지난주 서울 노원구의 한 복합문화공간 내 책방에서 이탈리아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이탈로 칼비노가 남긴 유명한 문장을 발견했다. “고전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 ‘백년의 고독’은 의심할 여지 없이 고전문학이다.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이나 멕시코 작가 후안 룰포의 ‘페드로 파라모’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 문화 등에 상대적으로 익숙한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문학을 통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남미 전역에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나 천운영의 ‘생각’이 읽히는 것처럼. 그러므로 한국에서도 아르헨티나 작가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우리 몫의 밤’(Nuestra parte de la noche)이나 칠레 작가 노나 페르난데스의 ‘환상특급’(La dimensión desconocida)이 읽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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