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거주’ 폐지 믿고 청약했는데”… 전세 놓으려던 당첨자들 발동동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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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시장 ‘실거주 의무’ 혼란]
“대출도 안돼 잔금 마련할 길 없어”… 입주 앞두고 ‘실거주’ 유지에 혼란
전매제한 풀려도 분양권 매매 못해… “벌금 내더라도 전세 놓을 것” 반발

분양가상한제 단지로 실거주 의무가 적용되는 서울 강동구 올림픽파크포레온(둔촌주공 재건축). 뉴시스
분양가상한제 단지로 실거주 의무가 적용되는 서울 강동구 올림픽파크포레온(둔촌주공 재건축). 뉴시스
2021년 경기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에 있는 아파트를 분양받은 직장인 서모 씨는 요즘 걱정이 태산이다. 현재 직장은 경기 화성시인데, 고양시 아파트의 실거주 의무를 지키려면 내년 입주에 맞춰 이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이나 취학, 질병 등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실거주 의무가 면제되지만 수도권 내에서의 이동일 경우 이런 예외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서 씨는 “고양에서 화성까지 출퇴근만 왕복 3시간이 걸린다”며 “실거주 의무 때문에 직장을 갑자기 옮길 수도 없지 않냐”고 하소연했다.

올해 1월 정부가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한 후 1년 가까이 주택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입주 예정자들의 혼란이 커지고 있다. 정부 발표에 따라 전세를 놓고 보증금으로 잔금을 치르려 계획했던 이들이나 자녀 교육, 직장 문제 등으로 당장 이사하기 힘든 이들 사이에서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투기 수요 억제라는 실거주 의무 제도의 도입 취지도 중요하지만 도입 당시와 달리 시장이 침체된 만큼 유연한 규제 적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실거주 못 하는 세입자 발 동동


10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실거주 의무를 적용받는 수도권 분양가상한제(분상제) 적용 아파트 4만7575채 중 1만5000채가 내년에 입주한다. 실거주 의무가 폐지되지 않을 경우 해당 주택 입주 예정자들은 잔금을 내고 입주 가능일 이후 바로 2∼5년간 실거주해야 한다. 만약 실거주 의무 기간 내에 특별한 사유 없이 이사하려면 분양가에 1년 만기 정기예금 평균 이자를 더한 수준으로 LH에 아파트를 팔아야 한다. 이를 어기면 1년 이하 징역, 1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생계나 자녀 교육 등의 문제로 당장 이사가 어려운 입주 예정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경기 화성시 동탄신도시 새 아파트에 당첨된 박모 씨는 “그새 경기가 안 좋아져 생업이 힘들어졌다”며 “대출도 안 되니 첫 ‘내 집’이지만 그냥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강동구 아파트에 당첨된 김모 씨는 “아이가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는 것을 힘들어 해 지금 학교에 그대로 다니게 하고 싶은데 실거주 의무를 지키기 위해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또 다른 입주 예정자 이모 씨는 “주변에 올해 1월 정부 발표만 믿고 전세를 놔 잔금을 치르려 했던 이들이 많다”며 “막상 입주가 임박해서 법 통과가 안 됐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차라리 법을 어기고 전세를 놓는 게 낫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우선 전세 계약을 체결해 잔금을 내고, 추후 실거주 의무 위반에 따른 벌금을 내겠다는 것이다. 서울 강동구 올림픽파크포레온의 경우 전용면적 84㎡ 기준 계약금만 1억3000만 원 수준인데, 잔금을 마련 못 해 이 돈을 날릴 바에는 1000만 원 이하인 벌금을 내는 것이 낫다는 의미다.

실거주 의무 위반 시 LH에 집을 매각해야 한다는 규정도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많다. 만약 인천 등 시세가 많이 떨어진 지역에서 이 같은 매각 요청이 나올 경우 LH는 오히려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집을 사들여야 할 수 있다. LH 관계자는 “주택법상 실거주 의무 주택의 매입 신청이 오면 부도 혹은 파산 상태가 아닌 이상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온라인 부동산 커뮤니티 등에서는 “분상제 주택은 LH가 가격 하락을 방어해주는 상품”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 “시장 상황 따라 유연한 규제 필요” 지적


실거주 의무 적용 단지와 인근 단지 간 형평성 문제도 지적된다. 분양 당시 분양가나 입지 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데도 분상제 적용 여부에 따라 실거주 의무를 달리 적용받는 사례가 나오고 있는 것. 분양 이후 시세차익에선 큰 차이가 없는데도 더 강한 규제를 적용받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서울 중랑구 중화동에서 분양한 리버센 SK뷰 롯데캐슬은 당시 일대가 분상제 지역이 아니어서 실거주 의무 규제를 피했다. 분양가는 3.3㎡당 2927만 원이었다. 같은 달 이 단지에서 1.7km 떨어진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서 분양한 장위자이 레디언트는 분상제 적용을 받아 실거주 2년이 적용됐다. 분양가는 3.3㎡당 2927만 원으로 리버센 SK뷰 롯데캐슬과 거의 같았다. 하지만 실거주 의무를 적용받은 탓에 전매제한이 풀려도 분양권을 매매할 수 없고, 입주에 맞춰 전세를 놓는 것도 불가능하다. 인근 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입주 예정자들 사이에서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불만이 많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실거주 의무가 집값 급등기에 도입된 규제인 만큼 시장 상황에 따라 유연한 적용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내년 서울 입주 물량이 급감하는 상황에서 전월세 공급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규제가 완화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권대중 서강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투기 수요를 줄이겠다고 급히 내놓은 규제인데 개인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상당히 제한하고 있다”며 “선의의 피해자를 구제하고 신축 전월세 공급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라도 실거주 의무는 조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동수 기자 firefly@donga.com
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
#실거주 의무#청약 당첨#주택법 개정#전매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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