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쓰나미 피해 현장에서 건축의 진정한 매력 마주했죠”[정양환의 요즘 (젊은)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18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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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혜인 디자인 스튜디오’ 대표 이혜인 씨 (상)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공간 디렉터 이혜인 씨는 스리랑카 코이카에서 건축 코디네이터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꾸준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관련 업계에서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아이웨어 ‘젠틀몬스터’ 공간팀에서 7년 동안 일하며 명성을 쌓은 그는 현재 ‘이혜인 디자인 스튜디오’를 창업해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다. 사진제공 이혜인 씨, ⓒ 백도현 작가
“자연은 신이 만든 건축이며, 인간의 건축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스페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1852~1926)

흔히들 인간 생활의 3가지 기본요소를 ‘의식주(衣食住)’라 한다. 등수를 매기는 게 무의미하지만, 주는 의식과는 살짝 결이 다르다. 먹고 입는 행위가 비교적 간명한 것과 달리, 어딘가에 머무르고 생활한다는 건 상당히 복합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일단 ‘집’을 떠올려 봐도, 어떤 형태로 거주하는가는 삶의 질은 물론 방향까지 가늠한다.

그런 뜻에서 ‘공간(空間)’을 창조한다는 건 단순히 건물을 세우거나 꾸미는 행위가 아니다. 사람을 포함한 생물이 생명을 영위할 장소를 만드는 일이다. 빽빽하게 밀집된 집단주택이건 허허벌판에 펼친 간이텐트건, 공간을 머무는 방식은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때문에 하나의 공간은 만드는 이와 살아갈 이의 세계관을 담아낸다.

건축가 겸 인테리어디자이너인 이혜인 씨(37)가 스스로를 “공간 디렉터”라 불러주길 바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국내 건축·인테리어 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청년 작가 중 하나인 그에게, 인간을 둘러싼 공간은 단지 머묾을 제공하는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매개체가 될 때, 공간은 비로소 본연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2년 전 ‘이혜인 디자인 스튜디오’를 창업한 그의 공간 철학을 들어봤다.

-하시는 일이 뭔지 설명 부탁드릴게요.
“항상 이게 참 어려운 거 같아요. 요즘 그런 고민을 많이 하는데, 하나로 단정 짓기가 어렵더라고요. 스스로는 일종의 ‘해결사’라 여기고 있어요. 건축을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전 뭔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함께 참여한 사람들을 조율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건축가나 디자이너보단 ‘공간 디렉터’가 제 일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는 단어가 아닐까 싶네요.”

이혜인 공간디렉터가 2021년 작업한 서울 강남구 역삼동 창업보육센터 ‘마루360’의 스몰글라스 설계 프로젝트. 사진제공 이혜인 씨, 인스타그램 @studioleehaeinn
-공간 디렉터란 직함이 생소합니다.
“예전엔 건축가나 인테리어 디자이너 등을 구분 짓는 경향이 강했는데, 해외에선 이런 개념들이 모호해진 지 오래됐거든요.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란 게 바깥 건축과 내부 인테리어 모두 중요하잖아요. 바라보는 시선이 바깥에서 안을 향하느냐, 안쪽에서 밖을 향하느냐는 차이일 뿐이죠. 요즘은 국내에서도 이런 걸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흐름으로 많이 바뀌고 있어요.”

-단순히 설계나 디자인만 하는 게 아니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그렇죠. 제가 올해로 14년째 이쪽 일을 하고 있는데, 하나의 도면을 내놓는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거든요. 결국 하나의 공간이 완성돼야 마무리라고 할 수 있죠. 그 과정에서 참여한 모든 이들이 최대한 만족할 수 있게 하는 게 디렉터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죠.”

-야구나 축구 감독이랑 비슷하네요.
“너무 좋은 비유라 맘에 드는데, 좀 거창해서 부끄럽네요. 공통점이 있긴 해요. 예를 들어, 하나의 생활공간을 떠올려보세요. 그곳에 어떤 가구나 식기, 꽃 등이 놓이는가도 정말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플로리스트나 세라미스트가 될 순 없으니 가장 어울리는 전문가를 찾아서 기용해야죠. 또 결국 그 공간을 이용할 사람과도 소통이 잘 돼야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협업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흥미롭네요. 어릴 때부터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았나요.
“부모님 영향을 많이 받은 거 같아요. 아버지가 스리랑카에서 자수 관련 공장을 운영하셨는데, 1997년 초등학생 때 가족이 모두 건너가 그쪽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한국과는 다른 이국적인 건축문화를 접하게 됐죠. 어머니가 집안 꾸미기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도, 그땐 몰랐지만 자연스레 영향을 받았겠죠.”

스리랑카의 세계적인 건축가 제프리 바와(Geoffrey Bawa)가 설계한 ‘루누강가 정원.’ 20세기 최고의 정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루누강가는 ‘소금의 강’이란 뜻이다. 스리랑카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이혜인 디렉터는 2019년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사진제공 이혜인 씨
-스리랑카는 왠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나라예요.
“네, 같은 아시아라 낯익지만, 그리 알려진 게 많진 않죠. 홍차 정도나 유명할까요?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면 다들 ‘아하’ 하시며 무릎을 딱 치세요. 인도 아래쪽 섬나라인데 바로 옆에 몰디브가 있어요.”

-하하, 진짜로 확 와 닿습니다.
“네, 천혜의 환경을 가진 나라다 보니, 감사하게도 어릴 때부터 자연의 아름다움을 실컷 누릴 수 있었어요. 실은 저희가 갔을 때 아직 내전이 끝나지 않았던 상황이라, 부모님은 여러모로 힘드셨을 거예요. 자식들 안전 문제도 염려됐을 거 같고. 근데 저야 어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바다에서 실컷 뛰놀곤 했죠. 아무래도 학교도 한국보단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친구들하고도 즐겁게 지냈고요.”

-그런 경험이 본인의 진로에도 영향을 끼쳤나요.
“그때는 몰랐어요. 제가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왔는데, 학교에 다니다 보니까 제가 한국에서 쭉 나고 자란 친구들이랑 살짝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1학년 때 디자인 과제를 해갔는데, 전 집에 문이 없는 게 문제가 된단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스리랑카는 다 뻥뻥 뚫려있으니까요. 저한텐 앞바다가 정원이고 놀이터였어요. 햇볕이 안방까지 쏟아지고 벌레가 그냥 날아다니는 것도 당연한 거였고요. 고층 아파트에서만 산 친구들과는 집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이 차이가 났어요. 그렇다고 제가 더 낫다는 건 절대 아니고, 서로가 달랐던 거죠.”

-고등학교 때도 건축과가 목표였나요.
“아뇨. 아까 말씀드렸듯, 어릴 땐 제가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몰랐어요. 실은 어머니가 공예 쪽으로 일하셔서, 자연스럽게 조소과를 꿈꿨어요. 근데 당신께서 고생하셔서 그랬는지, 예술 쪽은 취미로 하라고 하셨어요. 저도 뭐 꼭 해야겠단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라서…. 그러다 고등학교 때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어요.”

지난해 제주시 애월읍에 있는 ‘점 스토어’ 설계 프로젝트 당시 현장 방문한 모습. 사진제공 이혜인 씨, 인스타그램 @leehaeinn
-특별한 계기가 뭐였나요.
“기억하시겠지만, 2003년 인도네시아 몰디브 등에 엄청난 쓰나미가 있었잖아요. 제가 살던 콜롬보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스리랑카도 동부지역이 큰 타격을 입었어요. 그때 한국에서 구호단체들이 많이 왔는데, 그분들을 돕고 통역할 사람들이 필요했어요. 여러 나라 사람들이 참여하는지라 영어도 가능한 사람이어야 했죠.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고등학생들도 나서게 된 거죠. 그때 저도 참여하게 됐는데, 피해 현장에서 느낀 게 많았죠. 그런데 현장에는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들도 많이 와 계시더라고요.”

-건축가들이 왜 온 건가요.
“난민 쉼터나 구호센터 같은 걸 짓기 위해서예요. 저도 그때 처음 알았는데,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일종의 재능기부를 하기 위해 오는 거죠. 안도 다다오나 반 시게루 같은 거물들도 직접 현장에 와서 봉사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그들은 구호센터 하나를 지어도 뭐가 다르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건축가가 이런 일도 한다는 걸 알게 됐고, 그렇게 완성된 건축물이 너무 멋져 보였어요.”

-정말 인상적인 계기네요. 소중한 경험이고요.
“맞아요. 그리고 그때 배운 게 있어요. 건축은 크고 거창한 건물만 짓는 게 목표가 아니라 그 상황에 맞는 공간을 만드는 데 있다는 걸요. 쓰나미로 집을 잃은 사람에게 화려한 집을 지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피해자들이 지금 당장 맘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하는 거잖아요. 그저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와 그늘만 제공하더라도,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심정을 공감해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건축 또한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을 가지게 됐죠.”

-외국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권유하셨어요. 부모님이 다른 건 크게 간섭하지 않으셨는데, 어디든 상관없으니 대학은 한국으로 꼭 가라고 하셨어요. 너희는 외국에서 자랐지만 한국인이니까 한국을 더 배워야 한다고요. 오빠도 한국으로 와서 군대도 다녀왔고요. 저도 자연스럽게 그걸 당연하게 여겼어요. 지금도 제가 회사를 관두건 창업을 하건 언제나 응원해주시지 뭐라 그러시진 않아요. 그런 점들이 항상 감사하죠.”

이혜인 디렉터가 올해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여행 때 모습. 사진 제공 이혜인 씨, 인스타그램 @leehaeinn
-자식의 의견을 존중해주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그 덕분에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일에 맘껏 도전해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어릴 때부터 딱 한 가지만 엄격하게 가르치시고, 나머진 편하게 해주셨어요. 예의범절. 공부 못 해도 좋고, 딴 건 맘대로 하되 항상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라고 하셨어요. 특히 어른들에게. 제가 어르신에게 인사 잘하는 사람이 된 것도 그런 영향 때문이에요. 건축 쪽 일을 하면 다방면으로 나이 지긋한 분들과 일을 많이 하는데, 절 좋게 봐주시는 게 부모님 가르침 덕분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 대학 생활은 어땠습니까.
“너무 즐거웠어요. 특히 교수님들이 ‘건축쟁이들은 자기들끼리만 노는 경향이 있다. 여러 분야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해라’고 강조하셨는데, 전 그 말씀을 정말 잘 지켰습니다, 하하. 친구들이 ‘혜인이는 홍대 앞에서 100m 걸어가며 아는 사람한테 100원씩만 받아도 술값 나오겠다’고 했을 정도예요. 단지 학생뿐만 아니라 주변 상가 어른들하고도 잘 지냈어요.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건축도 결국 협업이거든요. 다양한 사람과의 소통이 무척 중요해요. 이렇게 말하니 놀기만 한 거 같은데…, 놀기도 잘 놀고 공부도 실컷 했어요. 졸업하고 부모님한테 ‘나 4년 동안 열심히 배웠으니까 당분간 취직 안 하고 놀 거야’라고 선언했을 정도니까요.”

-부모님이 뭐라 안 그러시던가요.
“네, 다행히요. 살짝 걱정하신 거 같긴 한데, 일단 내버려 두셨어요. 친구들은 하나둘 회사에 취직하는데 저만 그러고 있는 게 좋아 보이진 않으셨겠지만, 전 그때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스스로 열심히 했으니 잠시 백수 생활을 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었어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확신 같은 것도 필요했고요. 그때 전 잘 되느냐 못 되느냐 같은 기준으로 저를 보기보단, 진짜 하고 싶은 잘 찾아서 최선을 다하고 그 순간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첫 직장을 스리랑카에서 시작했어요.
“네, 첨부터 그럴 맘으로 간 건 아니었고요. 부모님하고 시간 보내며 쉬고 싶어서 간 거였는데 우연히 기회가 주어졌어요. 부모님 지인 가운데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 소장님이 계셨는데, 마침 건축 코디네이터를 뽑고 있다면서 해볼 생각이 없냐고 제안하셨어요. 현지를 잘 아는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네가 딱이라고 하셨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코이카는 어릴 때부터 봉사활동 같은 걸 하면서 익숙하기도 했고요. 그땐 제가 그걸 잘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좋은 일이고 새로운 경험이니까 일단 도전해보자는 마음이었죠.”

(다음 주 토요일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나의 옛날이야기] ‘요즘 (젊은) 것들’은 연재 글마다 청년들이 직접 고른 옛 사진들을 싣고자 합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 시절을 들춰보는 ‘코너 속의 코너’입니다. 이혜인 디렉터가 보내준 첫 번째 사진은 1996년 스리랑카에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 방갈로 앞에서 찍은 가족 모습입니다. 이 디렉터는 인터뷰 내내 부모님 포함 가족에 대한 감사함과 사랑을 자주 표현했는데요. 그런 다복함이 잘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사진 제공 이혜인 씨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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