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 중에도 곡 작업…사카모토 류이치가 전하는 ‘음악의 순간’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7일 10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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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가 지난해 12월 온라인 콘서트를 선보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한 올 3월 19일 직전까지 피아노 솔로 음원을 녹음했다. 씨앤엘뮤직 제공
“저는 앞으로 암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음악을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2021년 1월, 20시간에 걸쳐 대장의 30㎝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은 일본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가 수술 직후 남긴 말이다. 2020년 말 직장암이 폐와 간, 림프에도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5년. 남겨진 생의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인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음악이었다.



신간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위즈덤하우스)는 올해 3월 28일 71세에 세상을 떠난 사카모토가 생전 남긴 에세이다. 암 투병 중이던 지난해 7월부터 올 2월까지 일본 문예지 ‘신초(新潮)’에 연재된 칼럼을 엮었다. 책의 구성은 “시간은 말하자면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라는 그의 말처럼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흐른다. 그는 암 진단을 받던 순간, 첫 수술을 받던 순간, 부모를 떠나보낸 순간 등 자신과 맺은 여러 인연들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써내려갔다.

시간의 흐름은 제각각이지만 모든 기억의 한가운데엔 ‘음악’이 있다. 병실에 누워 있던 그를 구원한 것 역시 음악이었다. “먹어야 할 약들은 산더미에, 몸도 좀처럼 자유롭게 쓸 수 없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문득 음악에 마음을 뺏기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우울한 병실 안에서도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투병 중에도 일기를 쓰듯 신시사이저와 피아노 건반을 치며 자신에게 찾아오는 음악의 순간을 기록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음원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12곡을 골라 올해 1월 17일 생일에 ‘12’라는 제목의 앨범을 발매했다.

2022년 9월 사카모토 류이치는 자신의 연주 장면을 남기기 위해 일본에서 소리의 울림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스튜디오를 빌려 며칠에 걸쳐 피아노 솔로 공연을 녹화했다. Neo Sora ⓒKab Inc. 위즈덤하우스 제공


음악이 그를 구원한 것처럼 그 역시 그런 음악을 남기고 싶어 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어린이 음악 재생 기금’을 설립한 것이 대표적이다. 지진 피해를 입은 학교 1850곳에 망가진 악기들을 무상으로 수리하고, 악기를 교체하는 기금을 마련한 것. 그는 자신이 이 일을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인간에게는 물과 식량뿐 아니라 음악도 필요하니까.”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엔 키이우에 사는 바이올리니스트 일리야 본다렌코와 자선앨범을 발매했다. 일리야는 키이우의 지하대피소에서 사카모토가 작곡한 ‘Piece for Illia’에 맞춰 바이올린을 연주한 음원을 녹음했다. 음원 수익은 우크라이나 지원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사카모토는 지원금보다 어느 지하대피소에 울려 퍼졌을 일리야의 바이올린 선율을 더 뜻깊게 여겼다. “저로서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인 일리야가 제가 쓴 곡을 아름다운 소리로, 진심을 다해 연주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결실을 얻은 작업이었습니다.”

제목은 그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영화 ‘마지막 사랑’(1990년)에 나오는 대사다. 가장 마지막 장에는 장례식 때 틀어달라며 그가 남긴 33곡의 플레이리스트가 담겼다. 가장 마지막 문장은 ‘Ars longa, vita brevis(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을 빌린 이 문장을 끝으로 그의 이야기는 마치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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