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이 다시 연 ‘조국의 문’[김지현의 정치언락]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9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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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경남 양산 평산책방을 찾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문재인 전 대통령과 평산책방 앞치마를 입은 채 계산대 앞에서 웃고 있다. 조 전 장관은 이 사진과 함께 “‘길 없는 길’을 걸어가겠다”라고 페이스북에 올린 직후 정치권에선 조 전 장관의 내년 총선 출마를 둘러싼 공방이 이어졌다. 조 전 장관 페이스북
지난주 여의도를 한바탕 흔들어놓은 사진입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지사항’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고 “6월 10일 문재인 대통령님을 오랜만에 찾아뵙고 평산책방에서 책방지기로 잠시 봉사한 후 독주를 나누고 귀경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글에서 “2019년 8월 9일 검찰개혁의 과제를 부여받고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됐지만, 저와 제 가족에게는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시련이 닥쳐 지금까지 진행 중”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한 뒤 “문재인 정부의 모든 것이 부정되고 폄훼되는 역진과 퇴행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길 없는 길’을 걸어가겠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사실상 정계 복귀를 시사하는 듯한 메시지입니다.

조 전 장관이 ‘문 전 대통령과 독주를 나눴다’라며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봉황 무늬 등 청와대 로고와 ‘대한민국 대통령 내외 문재인 김정숙’이라고 적힌 술병이 놓여있다.
그가 페이스북에 함께 올린 여러 장의 사진 속 술병에도 눈이 가더군요.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문양 아래 ‘대한민국 대통령 내외 문재인 김정숙’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카메라에 잘 보이게끔 돌려놓은 듯한 각도도 인상적이네요. 과거 조 전 장관이 2019년 8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소주를) 종류별로 돌아가며 (마신다)”며 ‘대선’ ‘진로’ ‘좋은데이’ 술병을 차례대로 나열해 올렸던 사진을 ‘오마주’라도 한 건가 싶더군요.

조 전 장관의 페이스북 글이 올라온 직후 민주당은 또다시 ‘조국의 늪’으로 빠져든 모습입니다. 당내에선 조 전 장관의 내년 총선 출마 여부를 둘러싸고 일주일 내내 왈가왈부가 이어졌죠. 일단 ‘친문’(친문재인)과 당내 강경파를 중심으로 ‘조국 옹호론’이 우세했습니다.

“(조 전 장관이) 출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석열 정부가 보이는 검찰 독재의 대항마로서의 상징적인 성격 등 때문에 그렇다.”(12일 김의겸 의원)

“윤석열 정권의 심판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치적 공간을 다 열어줘야 한다.”(13일 박성준 의원)
반면 비명(비이재명)계에선 경악과 비명이 쏟아졌고요.

“조국의 강, 김남국의 늪, 다시 조국의 늪에 빠지기 시작하면 공정의 문제를 우리가 다시 꺼내 들기는 굉장히 힘들어질 것이다.” (13일 이원욱 의원)

“민주당에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다면 출마는 접는 게 좋다. 우리가 대선을 왜 졌는가?” (15일 조응천 의원)

“(민주당 내) 이것저것 여기저기 지뢰밭 다 터지고 있는 상황에 조 전 장관이 나온다고 해도 비중이 예전 같지 않다. 워낙 이슈 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조 전 장관 출마도) 그중에 하나, n분의 1이다.” (16일 이상민 의원)
마침 지난주 서울대가 조 전 장관의 교수직 파면을 의결하면서 조 전 장관의 총선 출마 쪽에 더 무게가 실렸죠. 민주당 내에서는 서울대를 향한 날 선 비판과 함께 본격 ‘조국 감싸기’ 발언들이 쏟아졌습니다.

“서울대의 조국 교수 파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군국주의와 반유대주의 광풍 속 유대인 출신 프랑스 대위 드레퓌스가 1894년 간첩 혐의를 받고 옥살이를 한 뒤 재심을 통해 무고를 인정받은 사건)이다. 부산대 의전원 합격자 표창장 하나로 멸문지화를 당한 조국 교수의 가족,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14일 정청래 최고위원)

“서울대가 갑자기 작년 7월에서야 여러 가지 품위를 손상한 행위 등을 이유로 징계를 논의했는데 사실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국민의힘이 집권여당이 됐기 때문에 논의가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14일 장경태 최고위원)

“(파면은) 무도한 짓이다. (서울대) 졸업생 명부에서 나를 빼라고 하고 싶다. 서울대 교수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본인 잘못도 아니고 딸이 장학금 받아서 김영란법 위반이라고 파면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16일 이해찬 상임고문)
어쨌든 다시 스포트라이트 한가운데로 들어왔으니 조 전 장관으로선 페북 글을 올린 목표를 100% 이상 달성한 듯하네요.

조 전 장관에겐 총선 출마라는 꿈이 있다 치더라도, 문 전 대통령은 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 퇴임 후엔 ‘잊혀진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전직 대통령이 왜 그렇게 ‘셀프 노출’을 못해 안달이고, 스스로 정치권을 들쑤시지 못해 난리인 걸까요.

문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사저가 있는 평산마을에 책방을 내고 ‘책방지기’로 변신했습니다. 본인의 SNS와 별도로 평산책방 페이스북과 유튜브도 개설했죠. 지난 5월 25일로 개업 한 달을 맞은 평산책방은 페이스북에 “한 달 동안 2만2691권의 책이 판매됐고, 4만297명의 손님이 찾았다”고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요즘 문파들 사이에선 평산책방을 찾아가 문 전 대통령 부부와 만나 찍은 인증샷을 서로 공유하는 게 유행이라 합니다. 흡사 정치인 팬미팅 같은 느낌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가 지난달 평산책방에서 계산대 업무를 보고 있는 모습. 평산책방 페이스북
평산책방이 자체 페이스북에 오픈 한 달을 맞아 올린 글. 평산책방의 판매 1위는 ‘책 있는 사람-문재인의 독서노트’였다.
평산책방이 자체 페이스북에 오픈 한 달을 맞아 올린 글. 평산책방의 판매 1위는 ‘책 있는 사람-문재인의 독서노트’였다.
이에 대해 한 문재인 청와대 출신 인사는 “문 전 대통령이 윤석열 정부의 ‘전 정부 탓’에 대한 분노가 워낙 크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숨어 지내야 하느냐’는 불만을 이런 ‘노출’을 통해 스스로 달래는 것 같다”고 설명하더군요. 자신의 임기 중 벌어진 부동산 등 각종 정책 실패나 ‘조국 사태’를 비롯한 민주당의 각종 ‘내로남불’ 사건, 강성 팬덤이 주도하는 극단적 정치 문화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 한마디 없이 그저 현 정권이 전 정권 탓하는 것이 억울하고 괘씸하다는 겁니다.

한 재선 의원은 “자신의 ‘전언 정치’가 자꾸 논란이 되니 앞으로는 양산 사저로 찾아오는 정치인들은 안 만나겠다 해놓고는, 총선을 1년 앞두고 책방을 열어 정치인들에게 새로운 판을 깔아준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재명 대표의 리더십 위기가 한창이던 올해 3월, 문 전 대통령을 일주일 간격으로 찾아간 민주당 박용진 의원과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이 대표에 대한 문 전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진실공방’이 벌였죠. 논란이 이어지자 문 전 대통령 측은 4월 초 “당분간 정치권 인사들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은 바 있습니다. 그때 말한 ‘당분간’이란 표현의 유효기간이 언제까지였는지 모르겠지만, 문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딱 한 달 뒤인 5월 10일 평산책방에서 이재명 대표와 박광온 원내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를 우르르 만났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5월 10일 오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최근 경남 양산 평산마을에 문을 연 평산책방을 찾아 계산대에서 봉사를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뉴스1
이날 비공개로 진행한 간담회에서는 문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야당과 소통했던 일화도 나왔다고 하죠.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이 당시 야당이었던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당사를 방문한 일을 언급하며 “대화라는 건 정치인에게 있어 일종의 의무와도 같은 것이다. 대화가 없으면 정치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했다죠. 취임 1년이 넘도록 이재명 대표와의 공식 회동을 하지 않고 있는 윤 대통령을 직격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당내에선 좋든 싫든,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양산과 평산책방을 향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발걸음이 줄이을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한 비명계 의원은 “이재명 대표 체제 하에서 내홍이 커질수록 당의 또 다른 구심점인 친문의 목소리는 점점 강해질 것”이라며 “그런 상황이면 문 전 대통령이 사실상 상왕 역할을 하게 되는 것 아니냐”라고 하더군요.

그동안 문 전 대통령의 과도한 정치 행보를 비판하는 내용을 취재할 때마다 적지 않은 민주당 의원들은 “그래도 전직 대통령은 건들지 마라”, “현직도 아닌데 좀 내버려 둬라”라며 자제를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실드’마저 약해진 듯합니다. 당장 10개월 뒤 총선을 치러야 하는 입장에서 문 전 대통령 과도한 행보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거겠죠. 한 의원의 말이 뇌리에 남습니다.

“막말로 문 전 대통령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패장’(敗將) 아니냐. 그러면 적어도 당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감을 갖고 내년 총선을 앞두고는 좀 조용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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