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기타리스트-화가 “우리도 ‘우영우’입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8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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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드라마 아닌 우리 곁의 ‘우영우’들


《“희망을 연주하는 지적장애 기타리스트 김지희입니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 중증 지적장애인 김지희 씨(28)의 어머니 이순도 씨(66)가 딸을 소개했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김 씨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막상 기타 연주를 시작하자 대단한 집중력을 보였다. 연주가 끝나자 팬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어렵습니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변호사가 좌충우돌하며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사진)가 세간의 화제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따뜻한 시선으로 우영우를 바라보며, 천재적 기억력을 가졌지만 사회성은 떨어지는 우영우와 함께 성장해 나간다.

화면 밖 현실은 어떨까. 아직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여전한 한국사회에서 장애인들은 변변한 직장조차 구하기 힘들다. 이루고 싶은 꿈을 얘기하면 주위에서 “허황된 소리 하지 말고 공장에 취직하라”는 말을 듣기 일쑤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재능을 갈고닦아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있다. 힘들게 외웠던 대사를 금세 까먹고, 악보를 읽지 못해 고생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뮤지컬 배우, 기타리스트, 화가의 꿈을 이뤘다. 사회에서 재능을 발휘 중인 ‘우리 곁의 우영우’ 3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적장애 기타리스트 “꿈-용기 연주, 할머니 돼서도 하고 싶어요”


기타 치는 김지희 씨… 평창 겨울스페셜올림픽 기타 독주
그림 그리는 김채성 씨… 고2 때 그림 공모전 도전해 수상
뮤지컬 하는 김진수 씨… 어릴 때부터 연극-공연 좋아해
현실판 ‘우영우’-가족들
“능력 못 보여주는 장애인 더 많아… 우리는 운이 정말 좋은 편이죠”

○ “할머니 돼서도 기타 칠 것”

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자신의기타를 들고 있는 기타리스트 김지희 씨.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자신의기타를 들고 있는 기타리스트 김지희 씨.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김 씨는 고교 2학년이던 2011년 아버지의 권유로 기타를 처음 손에 쥐었다. 김 씨의 부모는 “지희가 음악을 배우면서 친구를 사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사칙연산도 어려워했던 김 씨에게 악보를 보는 건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 김 씨는 “기타 선생님의 손가락을 촬영한 영상을 보며 한 음씩 연습했다”고 했다. 그렇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전국 장애 학생 음악 콩쿠르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2013년에는 평창 겨울스페셜올림픽(지적·자폐성 장애인들이 참가하는 국제대회) 폐회식 무대에서 기타 독주를 선보였다. 미국과 유럽 등을 돌며 최근까지 800회 넘는 공연을 했다고 한다.

기타는 김 씨가 사회에 진출하도록 돕는 길잡이가 됐다. 김 씨는 사회성이 부족해 고교 시절 교실에 있는 것만으로도 진땀을 흘리기 일쑤였다. 고교 졸업 때까지 비장애인 친구는 사귀지 못했다. 기타 연주를 시작한 뒤에도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 앞에 서면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한다.

어머니 이 씨는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딸과 함께 거리로 나와 딸의 무대를 만들었다. 이 씨는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딸의 연주를 한번 들어달라고 부탁했고, 지하철 역장님을 찾아가 역에서 한 시간만 연주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훈련을 거듭하면서 김 씨는 낯선 이들 앞에서 웅크렸던 몸을 펴고, 숙였던 고개도 들게 됐다.

최근 자신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기타 선율에 얹어 청소년 대상 ‘스토리텔링 콘서트’를 진행 중인 김 씨는 “할머니가 돼서도 기타를 치며 아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고 싶다”고 밝혔다.
○ “그림으로 행복 전하는 산타 될 것”
자폐성 장애인 김채성 씨가 4일 경기 부천시 그림대여업체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앞에서 붓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천=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자폐성 장애인 김채성 씨가 4일 경기 부천시 그림대여업체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앞에서 붓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천=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지난달 25일 찾은 경기 부천시의 한 그림대여 업체에는 화가인 자폐성 장애인 김채성 씨(22)의 작품이 진열돼 있었다. 김 씨는 “벚꽃 배경에 ‘키스 해링’ 스타일의 그림을 더한 추상화”라고 자신의 그림을 설명했다. 좋아하는 해외 화가의 그림 특징을 설명할 때는 신이 난 표정이었다.

김 씨는 유치원 때부터 줄곧 고래와 물고기 그림을 그렸고, 최근에는 상상 속의 외계인이나 꽃게들의 축제 같은 소재를 화폭에 담고 있다.

김 씨는 고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그림 공모전에 도전해 상을 받은 뒤 전업 화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의 작품이 환영받았던 건 아니다. 일부에선 ‘장애인 그림을 왜 전시해야 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묵묵히 그림에 몰두한 결과 이제 지방자치단체나 대학병원 등으로부터 의뢰를 받고 그림을 그리는 전업 화가로 자리 잡았다.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청사 집무실 벽면에 다른 장애인 화가의 그림과 함께 작품이 걸리기도 했다.

김 씨는 상상을 유려하게 그림으로 표현해 내는 재주가 있지만 타인과 깊게 의사소통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낀다고 했다. 가족과 대화하던 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거나 대화 주제와 상관없는 엉뚱한 말을 내뱉기도 한다. 하지만 김 씨는 “그림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산타할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요즘 드라마 ‘우영우’를 즐겨 본다는 김 씨는 “자유롭게 헤엄치는 고래의 모습이 어린 시절부터 너무 부러웠다. 주인공처럼 고래가 무척 좋다”고 덧붙였다.
○ “사흘이면 대사 잊으니 매일 연습”
자폐성 장애인 김진수 씨(왼쪽)가 1일 전북 전주시 한국전기안전공사 강당에서 인형탈을 쓴 채 동료 뮤지컬 배우와 나란히 서 있다. 전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자폐성 장애인 김진수 씨(왼쪽)가 1일 전북 전주시 한국전기안전공사 강당에서 인형탈을 쓴 채 동료 뮤지컬 배우와 나란히 서 있다. 전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자폐성 장애인 김진수 씨(20)는 뮤지컬 배우다. 발달장애인 등으로 구성된 유니버셜안전예술단의 일원으로 매주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앞에서 ‘전기 안전교육’을 주제로 한 공연을 펼친다.

연습 장소인 전북 전주시 한국전기안전공사 강당에서 만난 김 씨는 “어린 시절부터 연극, 공연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배우로 무대에 서는 날을 꿈꾸게 됐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김 씨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허황된 꿈을 갖지 말고 공장에 취직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김 씨는 “죽어도 원하는 일을 하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꿈을 이룬 김 씨지만 여전히 공연은 만만치 않다. 단원들은 사흘 정도만 지나면 연습했던 대사를 잊기 일쑤라고 한다. 무대에서 대사를 잊는 사고를 줄이려면 하루라도 더 모여 대사를 외우고 서로 점검해 줘야 한다. 김 씨는 “아이들이 어떤 장면에서 크게 웃는지 잘 알고 있다”며 “관객 반응을 보며 나도 세밀한 표정 연기를 잘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최근 월급을 받아 부모님께 가방과 옷을 선물했다는 김 씨는 “앞으로도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 “우리는 운이 좋았을 뿐”
현실판 ‘우영우’와 가족들은 “우리는 운이 정말 좋은 편”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채성 씨의 어머니 이은실 씨(49)는 “사회적 편견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장애인이 더 많다”고 말했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장애인 고용의무제도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1991년부터 시행된 이 제도에 따르면 근로자 50인 이상 규모의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은 각각 전체 근로자의 3.6%, 3.1% 이상을 장애인으로 고용해야 한다. 그러나 해마다 기업·기관 8200여 곳이 이 비율을 지키지 않아 7200억 원에 가까운 고용부담금을 내고 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관계자는 “의무 고용률 미달 기업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해 보면 제대로 직무를 분석하지도 않은 채 장애인이 하기 어렵다고 지레 단정하고 고용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송진호 기자 ji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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