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과 불황 덮친 세상에 대한 사고실험”

김태언 기자 입력 2021-09-07 03:00수정 2021-09-0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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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와 맞짱뜨는 판사 그려낸, 판사 출신 드라마작가
최근 종영 ‘악마판사’ 문유석 작가… ‘미스 함무라비’ 이어 판사 내세워
“다크 히어로 필요없는 세상 원해… 앞으론 코미디-SF까지 도전할 것”
드라마 ‘악마판사’에서 전 국민이 참여하는 라이브 법정 쇼의 재판장 강요한(지성). 문유석 작가는 “악마판사는 다크나이트풍의 장르적 캐릭터를 떠올린 게 씨앗이 됐다”고 말했다. CJ ENM 제공
문유석 작가(52·사진)는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기 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지냈다. 당시 그는 ‘개인주의자 선언’ ‘판사유감’ 등의 책을 펴내며 판사의 시각에서 현실비판 인식을 드러냈다. 이상적인 법원을 꿈꾸는 초임 판사 박차오름(고아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문 작가의 드라마 데뷔작 ‘미스 함무라비’(2018년)에도 자신의 경험이 반영돼 있다.

최근 종영된 tvN 드라마 ‘악마판사’는 판사가 주인공인 법정물로 전 국민이 참여하는 라이브 법정 쇼, 디스토피아 대한민국 등 흥미로운 가상 요소들이 가미됐다. 문 작가는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드라마 작가를 시작하는 입장에서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쓴 것일 뿐 코미디, 공상과학(SF), 정치물, 사극, 애니메이션까지 경계 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써 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밝혔다.

악마판사는 한 재단이 국가를 장악한 대한민국에서 적폐들과 맞선 판사 강요한(지성)의 이야기를 그렸다. 강요한은 금고 235년형, 태형 등 파격적인 판결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다. 문 작가는 “미스 함무라비 방영 당시 완전히 반대되는 톤의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생각해 마련한 작품”이라며 “분위기가 다를 뿐 실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박차오름이 당한 핍박과 고난을 떠올리면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장밋빛은 아니지 않냐”고 했다.

드라마 속 세계는 시민들의 건강한 연대를 기대할 수 없다. 나라를 휩쓴 역병과 이에 따른 경제 붕괴로 사회 불만이 극에 달해 약탈과 폭동이 벌어진다. 혼란을 틈타 막말을 일삼는 유튜버 허중세(백현진)가 인기를 끌며 대통령이 된다. 문 작가는 “코로나 사태 당시 스페인에서의 요양원 노인 방치, 미국 트럼프 지지 시위대의 국회의사당 습격 등 세계가 한순간에 달라지는 걸 보면서 무서움을 느꼈다”며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어떨까를 상상하다 ‘블랙 미러’나 ‘브이 포 벤데타’ 등 근미래 디스토피아물처럼 일종의 사고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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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장면에는 현실의 사건들이 반영됐다. 역병이 퍼졌다는 이유로 빈민촌 주민들을 탄압하려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주민 폭행에 앞장선 죽창(이해운)에 대한 재판이 대표적이다. 죽창은 재판에 앞서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은 이익만을 좇는 백만 명의 힘에 맞먹는다”는 구절로 시작되는 선언문을 낭독한다. 2011년 노르웨이에서 77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극우 테러리스트 브레이비크의 트위터 글에서 따온 것이다.

극중 ‘사이다 재판’은 통쾌함을 선사하지만 극약 처방이 과연 옳은 방식인지를 자문하게 한다. 허중세 등 적폐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지도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을 보며 “난 이제 무얼 해야 할까? 요한이 필요 없는 세상을 위해서”라고 독백하는 판사 가온(진영)의 대사는 작가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문 작가는 “아직 늦지 않았으니 그런 세상을 만들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시민들은 정치, 사법, 언론 등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다크 히어로가 되어 주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그저 자기 할 일을 묵묵히 잘해 다크 히어로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주길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악마판사#지성#문유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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