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혼의 태권청년’ 주정훈, 동메달 결정되자 주저앉아 오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3일 21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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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같은 동메달이 확정된 순간 ‘투혼의 태권청년’ 주정훈(27·SK에코플랜트)은 오열했다.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종주국’ 한국 태권도를 대표해 ‘나 홀로’ 나선 첫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 무대. 부담감이 컸다. 첫 경기를 패한 뒤 자신감이 떨어졌지만 무너지진 않았다. 모두가 고개를 젓던 패자부활전에서 ‘내 발을 믿자’,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외우며 끝까지 살아남았다.

결국 꿈의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패럴림픽 메달은 신이 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롤러코스터 같은 긴 하루를 빛나는 동메달로 마무리한 태권 청년은 공동취재구역(믹스트존)에서 우는 듯 웃었다.

주정훈은 3일 오후 8시 15분 일본 지바현 마쿠하리 메세홀 B에서 열린 2020 도쿄 패럴림픽 태권도 남자 75㎏급 패자 결승전에서 마고메자드기르 이살디비로프(30·러시아패럴림픽위원회)와 맞붙어 24-14로 승리했다.

이살디비로프는 이날 오전 열린 16강전에서 주정훈을 35-31로 물리치며 패자부활전 무대로 내몬 장본인이었다. 첫 경기 패배 충격을 딛고 승승장구한 주정훈은 승자 준결승에서 후안 디에고 로페스(19·멕시코)에게 12-14로 패한 뒤 동메달 결정전에 나선 이살디비로프를 다시 마주했다.

주정훈은 1회전부터 작정한 듯 강공으로 나섰다. 3연속 몸통차기에 성공하며 6-0으로 앞서나갔다. 패자 4강 승리 뒤 “내 오른다리는 지금 내 다리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그의 발차기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음 급한 상대가 머리 부분을 가격하는 플레이로 감점을 받으면서 주정훈은 8-2로 앞선 채 1회전을 마쳤다. 패럴림픽에서는 머리 부분 공격이 금지다.

2회전 초반 한차례 공격을 주고 받은 뒤 탐색전이 이어졌다. 10-6에서 주정훈의 몸통차기가 두 차례 작렬했다. 14-7로 앞선 채 맞이한 3회전. 이살디비로프가 몸통차기로 따라붙었지만 45초를 남기고 주정훈이 3연속 발차기에 성공하면서 24-14 승리를 거뒀다.

주정훈은 이날 출전한 네 경기 중 세 경기에서 30점 이상을 올렸다. 상대 몸통을 노리는 발차기 기술를 앞세운 ‘닥공’(닥치고 공격) 모드로 패럴림픽 첫 메달 역사를 완성했다.

주정훈은 태어난 직후부터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 대신 할머니 밑에서 컸다. 두 살 때 할머니가 지리를 비운 사이 농기구에 오른쪽 손이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오른쪽 손목 아래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비장애인 태권도 선수로도 전국 대회에서 8강, 4강에 오르며 기대를 모으던 주정훈은 사춘기 시절 경기장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상처를 받고 고등학교 2학년 때 태권도를 접었다. 다시 태권도를 꿈꾸게 된 건 태권도가 패럴림픽 정식 종목이 된 다음이었다. 2017년 12월 도복을 다시 입었고 올해 요르단 암만에서 열린 아시아 선발전을 1위로 통과하면서 한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도쿄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주정훈은 “이제 상처를 당당히 드러낼 수 있다. 태권도로 돌아오길 잘했다”면서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세계에서 3등 했다.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부모님도 아들 자랑을 많이 하시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모님과 함께 메달을 들고 치매를 앓고 계신 할머니를 뵈러 갈 것이다. 할머니가 저를 못 알아보시더라도, 손자가 할머니 집에서 다치긴 했지만 할머니 덕에 이 대회에 나올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어 “할머니가 제가 자라면서 본인 탓을 많이 하셨다. 우리 손자 너무 잘 컸는데 나 때문에 이렇게 다쳤다고 자책하셨다. 이젠 그 마음의 짐을 덜어드릴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이제 주정훈은 2024 파리 패럴림픽 금메달을 바라본다. 주정훈은 “파리 패럴림픽 경기장을 미리 찾아봤다.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대회를 통해 금메달은 가장 많이 노력한 사람이 가져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리에선 저도 1등을 할 수 있도록 죽어라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도쿄=황규인기자 kini@donga.com·패럴림픽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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