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문인 이규보는 왜 ‘동명왕편’을 썼을까?

이환병 서울 고척고 교사 입력 2021-05-12 03:00수정 2021-05-12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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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생애와 저술활동
관직 얻는데 인맥 중요했던 시기… 당시 저술한 고구려 왕 일대기
벼슬 얻기 위한 글이라는 해석… 관직 얻은 후 승승장구 했으나
정권 맞춤 글쓰기로 비판 받기도
고려의 문인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 동아일보DB
이규보(1168∼1241)는 무신정권 시기에 시인, 수필가, 관료로 활동하며 다양한 평가를 받은 인물입니다. ‘고려사’ 열전에는 ‘성품이 활달하고 거침없이 술을 마시며, 시문을 짓되 옛사람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공부하여 넓고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적혀있습니다. 열전은 이규보를 자유분방한 문학인, 문학사의 지평을 넓힌 사람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규보의 생애와 저술 활동을 관료 임명 이전과 이후로 나눠 살펴보겠습니다.

○무인에게 관직 구하는 시를 쓰고 ‘동명왕편’ 저술
이규보는 무신정변이 발생하기 2년 전인 1168년(의종 22년) 평범한 문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을 전후해 시를 지은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세에 일종의 사립교육기관이었던 성명재에서 과거를 준비했습니다. 천재적 재능은 있었지만 과거는 여러 차례 낙방했습니다. 무신정권 시기에 치른 과거라 합격하기 위해서는 실력보다 집권자와의 연결이 중요했지요. 또 그는 선천적으로 형식에 맞춘 글을 멸시했습니다.

이 시기 이규보는 ‘죽림고회’라고 부르는 문학인들의 모임에 참석합니다. ‘죽림고회’는 무신정권 시기 관직을 떠나 시와 술을 즐기는 문학인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학인들과 어울리는 영광을 누렸으나, 젊은 나이에 계속 은둔생활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20대 초반이던 1190년에 과거에 합격했지요. 당시에는 이의민이 집권한 시기였고, 과거에 합격했다 할지라도 관직에 임명되기 어려웠습니다. 집권자가 불러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집권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를 써서 바치던 시대입니다. 관직을 준비하는 사람, 세상을 등진 초야의 학자 모두 힘든 시기였습니다.

이규보는 25세부터 32세까지 관직을 구하는 시를 지으며 집권자가 불러주길 기다렸습니다. 불행하고 막막했던 그는 25세이던 1193년에 ‘동명왕편’을 저술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일대기를 영웅적 서사시의 형태로 서술했습니다. 그 저술 동기에 대해서는 현재 매우 다양한 주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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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해석은 유교적이고 신라사 중심인 ‘삼국사기’에 반대 의견을 제기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는 외적이 침략하는 시기에 민족의 자부심과 침략에 대한 항거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주장이지요. 세 번째는 집권자와 집권자의 측근 세력에게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과시하고 벼슬을 구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주장입니다. 주몽의 일대기는 무인들의 영웅 서사시이고 집권자와 민중 모두 공감하기 좋은 소재였습니다. 과거에 급제하고도 무인들에게 소용 가치가 없으면 등용되지 못하는 어려운 시기에 무인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저술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국정 총괄
고려의 문인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 묘역. 동아일보DB
최충헌은 1196년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규보는 1199년 최충헌이 개최한 시 모임에서 최충헌을 국가적인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관직은 전주지방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는 사록겸장서기(7품)였습니다. 관직의 대가로 받는 봉급은 적었고 행정 잡무마저 번거로운 자리였습니다. 또 주변 관리들의 중상모략으로 관직 생활이 고통스러웠고 결국 1년 4개월 만에 동료들의 비방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렇게도 관직을 구했건만 초임지에서 쫓겨난 신세가 된 거죠. 이후 끊임없이 최씨 정권과 연결된 인물을 통해 관직에 복직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규보는 1207년 최충헌이 여러 학자를 초빙해 개최한 백일장에서 ‘모정기’라는 글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모정기’의 마지막 구절은 “정자는 날개가 달린 듯 봉황이 나는 것 같으니/누가 지었겠는가/우리 진강후(최충헌을 일컬음)의 어짐이로다./잔치를 베푸는데 술이 샘같이 나오고 잔을 받들어 권하니 객은 천명이로다./잔 들어 만수무강을 비노니 산천이 변한다 해도 정자는 옮겨지지 않으리”였습니다. 최충헌에 대한 노골적인 예찬을 담고 있어 비굴해 보입니다만 최충헌은 이 글을 보고 칭찬하면서 드디어 직한림원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규보는 1219년 최우가 집권한 이후 관직 생활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특히 몽골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1232년 강화 천도를 찬성하고 몽골과의 전쟁 중 외교문서를 작성하면서 그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실질적인 국가 업무를 총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몽골 천도에 대해 “천도란 예부터 하늘 오르기만큼 어려운데/공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왔네/청하(최우 정부를 일컬음)의 계획 그토록 서둘지 않았더라면/고려는 벌써 오랑캐 땅 됐으리”라고 하면서 최우의 강화 천도를 찬양했습니다.

이규보는 몽골과의 전쟁 시기 몽골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했습니다. 몽골이 쳐들어오면 철수를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했고, 몽골이 그 대가로 수달피나 고려인을 바치라고 하면 그 부당함을 알리는 글을 썼습니다.

무신정권 시기 지식인의 유형은 초기부터 도피 유랑한 사람, 초기에 멀리 피신했다가 지방에서 유학자의 삶을 산 사람, 초기에 멀리 피신했다가 개경으로 돌아와 관직을 구했으나 구하지 못한 사람, 무신정권 초기 과거를 통해 관직에 임명되었거나 최씨 무신정권을 위해 관직에서 일한 사람 등으로 나뉩니다. 이규보는 마지막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특히 이규보는 60대 중반 이후 강화도에서 관직 생활의 최고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언제나 속마음은 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국내적으로는 국왕보다 무신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몽골의 침략 속에서 나라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비굴하기 짝이 없는 외교문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또 백성의 삶은 비참했으니 고통이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이환병 서울 고척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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