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똑같이 아파야만 공정한가[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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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책임을 임대인에 돌린 ‘공정 임대료’
경제문제를 공정잣대로만 재는 게 불공정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주 언급한 ‘공정 임대료’는 시장에 대한 시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례인 것 같다. “매출 급감에 임대료 부담까지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인지에 대한 물음이 매우 뼈아프게 들린다.” 이 발언으로 임대료를 깎아주지 않은 건물주들은 일거에 불공정한 사람들이 돼버렸다.

특정 사안에 대한 공정함을 묻는 건 도덕적 판단을 포함하고 있다. 경제에 굳이 도덕적 판단이 필요하냐는 의견도 있지만 경제 역시 공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계약이라는 형태로 룰을 만들고, 법과 제도 그리고 국가가 그 계약의 이행을 강제한다. 공정하지 않다는 건 위력과 권력으로 기존 계약에 구속되지 않는 경로를 밟아가며 특권을 누리는 행위를 말한다.

그렇다면 임대인이 임대료를 깎아주지 않은 걸 공정이라는 잣대로 판단해야 하는 것일까. 똑같이 아파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공정한 게 아니고 계약을 지키지 않거나 개천의 ‘가붕개’(가재 붕어 개구리)들은 생각도 못 한 방식으로 게임의 룰을 교묘히 위반하는 게 불공정한 거다. 필기시험을 한 번도 안 보고 외고에서 명문대를 거쳐 의학전문대학원에 가거나, 부모 친구인 대학교수의 논문에 고등학생이 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게 불공정한 것처럼 말이다.

임대인은 당초의 계약대로 임대료를 받을 뿐 편법으로 세입자의 이익을 갈취하는 게 아니다. 더욱이 임차인이 영업시간에 제한을 받아 매출이 급감하게 된 건 임대인 때문이 아니다. 원인 제공을 국가가 했다면 당연히 국가가 피해를 보상해주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책임을 도덕적 판단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와 사적 계약을 충실히 이행 중인 임대인에게 뒤집어씌운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공정하다. 임대인이 임대료를 깎아주도록 유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건 공정과 불공정의 영역이 아니라 공동체적 가치에 호소하거나 경제적 인센티브를 주면 될 일이다. 캐나다나 독일은 상대적으로 공정한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 나라들도 이번 코로나 사태 발발 뒤 소상공인 임대료를 국가가 직접 지원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이 정부 들어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경제 문제를 선악이나 도덕의 문제로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착한 임대료’ ‘착한 임대인’ 정책은 임대인은 원래 착하지 않다는 걸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임대료를 깎아주면 착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량하다는 것인가. ‘핀셋 과세’는 비싼 집을 갖고 있는 소수는 그들이 투기를 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벌금이나 다름없는 세금을 물려도 되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 이 과정에서 세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조세 형평은 다수의 묵인과 압력 속에 사라져 버린다. 최근 여당이 단독으로 통과시킨 경제 3법은 누구의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사안을 ‘공정경제’라는 이름으로 묶어 도덕적 당위를 부여해 놓았다. 이런 논리대로면 전 세계가 코로나로 고통받고 있을 때 백신으로 떼돈을 벌게 된 제약사들은 불공정한 세력이다. 백신을 구입하지 못한 우리 정부는 무능한 게 아니라 선량한 피해자일 뿐이다.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를 ‘착한 금 모으기’라고 하지 않았지만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패물을 싸들고 나왔다. 금을 내놓지 않았다고 해서 불공정하다고 손가락질한 적도 없고, 도덕적으로 비난하지도 않았다. 정부 역시 금 모으기에 동참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갈라 친 뒤 옳고 그름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았다.

다행히 당정은 피해 세입자에게 임대료를 직접 지원하는 방법으로 선회 중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과도한 공정의식이 여기저기서 불쑥 튀어나올 것이다.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말이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공정#국가책임#임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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