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 어린 여동생과 오랜만에 외출했다.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데 동생이 물었다. “언니, 이렇게 입으면 싸 보여?” 살짝 붙는 티셔츠였다. 동생은 가슴이 크다. 예전의 나였다면 입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야, 너 그런 옷 입으면 남자애들 눈요깃거리 돼.” 엄마도 내게 그렇게 말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든지 성적 대상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공포였다. 시대가 변했다. 이제 나는 적극적으로 의심한다. 지금까지 내가 듣고 자란 말들에 대해. 어린 동생의 입에서 나온 ‘싸 보인다’란 말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에게 값을 매기고 사고파는 문화에서 생겨난 말. 여성에게만 붙는 수식어다. 나는 살면서 지금까지 ‘싸 보이는’ 남자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너 입고 싶은 대로 입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잘못된 거야.” 그리고 내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노브라인데도 잘 다니잖아!” 그랬다. 자매는 각자 다른 이유로 가슴과의 전쟁 중이었다. 올여름 나는 본격적으로 노브라를 실천하고 있다.
브래지어가 당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24세 때였다. 흉부를 압박하는 코르셋 없이 24시간 생활하니 해방감이 엄청났다. 이 좋은 걸 동생에게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거절당했다. 잘 때도 브래지어를 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마음이 아팠다. 모든 여성의 마음에 강박처럼 있는 것, 브래지어였다.
친구들과 ‘노브라블럼’이라는 본격 노브라 체험 다큐도 찍었건만 여대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학교가 아닌 사회에서, 겨울이 아닌 여름에 노브라를 시도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노브라의 대중화에 힘써 준 설리 덕분이다.
노브라로 거리를 나서는 건 엄청난 시선폭력을 견뎌야 하는 일이다. 걸어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내 가슴으로 향하는 걸 모조리 지켜봐야 한다. 내 찌찌가 공공재인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브라를 내 삶의 선택지에 넣는 이유는 자연스러운 내 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굳이 가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의 몸은 음란물이 아닌데!
지난달, 강남 대로변에서 ‘가슴 해방 시위’가 있었다. 이들이 맨가슴으로 시위에 나선 이유는 페이스북코리아가 여성의 몸을 몰래 촬영한 불법 촬영물은 그대로 두고 인권 운동의 일종으로 올린 상의 탈의 퍼포먼스 사진을 ‘음란물’로 규정하고 삭제했기 때문이다.
“웃통을 벗은 채로 운동하는 남성들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여성들이 그렇게 운동하는 것은 보셨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여성의 몸은 ‘섹시하게’ 드러내되, ‘정숙하게’ 감춰야 하는 이중적인 요구를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논란이 커지자 페이스북코리아 측은 삭제된 사진을 복원하고 사과했다.
그녀들의 용기 덕분에 나는 이 여름, 좀 더 편하게 노브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동생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엔 너 대신 난리쳐 주는 이상한(?) 언니들이 많으니까, 입고 싶은 대로 입어!” 자, 그럼 한번 평소에 못 입던 옷을 입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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