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실 언니’로 유명한 작가 권정생은 생전에 편지를 많이 썼다. 아동문학가 이오덕과 30년에 걸쳐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은 서간집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는 그것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편지들은 그의 삶과 문학, 고뇌와 사유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그는 편지를 썼던 것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많은 편지 대필을 해줬다. 시골에서 살았던 그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부탁하면 시간을 쪼개어 대필을 해줬다. 예를 들어, 그는 윗마을 할머니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아들과 서신 연락을 하는 것을 도맡아 했다. 매월 한 번씩 오는 아들 편지를 할머니에게 읽어주는 것도, 그 편지에 답장을 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심지어 아들의 전사통지서까지 읽어줘야 했다. 편지를 읽어줄 때마다 그리움에 울던 할머니는 사랑하는 자식을 잃자 어미의 피울음을 울었다. 그 고통과 눈물을 나눠 갖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대필을 “흡사 그 사람의 대리 역할을 하는 일종의 연극배우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편지를 부탁한 사람의 감정까지 전달해야 하는 힘든 일이었다. 그러니 자기를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 세상의 낮은 자들을 향한 너그러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너그러움이 곧 그의 문학이었다. 자기표현에 능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편지 대필을 해줬던 것처럼, 그는 이 세상의 약자들에게 자신을 빌려줬다. 이것이 서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몽실 언니와 같은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그는 아프고 가난하고 외롭고 서러운 사람들의 편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자신의 펜 끝에서 나오는 서러운 이야기를 통해 위로받기를 바랐다. 서러움을 통한 서러움의 치유라고나 할까. 자신이 모은 돈과 인세를 세상의 ‘낮은’ 아이들을 위해 쓰라는 유언을 남긴 작가, 그가 쓴 이야기들의 밑바닥에는 편지 대필에서 엿볼 수 있는, 힘없는 타자들에 대한 너그러움이 있었다. 정말이지 문학원론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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