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지역 청각장애인 ‘24시간 수화통역체계’ 시급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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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이나 휴일 응급상황 발생시 수화통역 도움 못받아 위험 초래
119, 112 문자서비스도 도움안돼

대전 동구 판암동에 홀로 사는 청각장애인 박모 씨(75)는 이달 초 새벽 참기 어려운 복통으로 잠을 깼다. 한동안 고통에 시달리다가 어쩔 수 없이 옆집 문을 두드려 도움을 청했다. 119에 전화를 걸어도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 씨는 당시 옆집마저 응답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걱정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응급실에 도착해 의료진으로부터 “담석증이 심해져 패혈증으로 발전했다. 늦었으면 상황이 심각해졌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 ‘응급상황 무방비’ 청각장애인들

17일 대전시농아인협회에 따르면 청각장애인들이 야간이나 휴일에 수화통역의 도움을 받지 못해 위험에 처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홀로 사는 청각장애인 여성 이모 씨(60)가 한밤중 집에 침입한 치한에게 봉변을 당할 뻔했다. 격렬한 저항으로 치한이 그대로 집을 나가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지만 다시 침입할까 밤새 떨어야 했다. 하지만 112에 신고하지도 경찰서를 찾아갈 엄두도 못 냈다. 설령 통화가 되고 경찰을 만나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전에는 대전시농아인협회가 시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는 수화통역센터가 있다. 하지만 직원이 부족한 데다 24시간 대응 시스템을 갖추지 못해 청각장애인의 불편과 위험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수화통역 서비스가 가능한 센터 직원은 25명으로 1인당 310명가량의 청각장애인을 상대한다. 그렇다 보니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일해도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나마 23명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고 나머지 2명만이 다음 날 오전 1시까지 당번을 서는 운영 체계다. 이 때문에 박 씨나 이 씨처럼 새벽이나 휴일에 일을 당하면 속수무책이다.

이런 여건 때문에 수화통역 직원들은 공식 근무 외에도 예기치 않은 비상근무에 시달리고 있다. 20년 수화통역 경력의 한 직원은 “근무시간이 아닌 새벽이라도 청각장애인이 응급전화(영상통화)를 걸어오는 것으로 확인이 되면 받지 않을 수 없다. 몸이 아픈 경우 일단 119에 대신 연락을 해주지만 그것으로 일이 끝나지 않는다. 응급실에 가야 하고 입원을 시켜야 한다. 그러다 보면 밤을 지새운 뒤 출근을 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렇게라도 연락이 닿으면 다행이지만 수화통역사가 여러 가지 이유로 전화를 받지 못한다면 청각장애인은 위험한 상황을 그대로 맞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 “생명 구할 ‘24시간 수화통역체계’ 시급”

119 및 112 문자 서비스가 도입돼 있지만 사실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청각장애인들의 반응이다. 농아인협회 윤혜주 사무처장은 “청각장애인은 대부분 평소에 수화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문자 사용에 익숙지 않다. 응급상황에는 더더욱 수화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응급상황에 놓인 청각장애인에게 불편한 필담만을 요구하는 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수화통역 시스템 구축 상황은 지방자치단체마다 다르다. 서울은 이미 24시간 운영 시스템을 구축했고 일부 시도도 준비 중이다. 김동섭 대전시의원(더불어민주당 유성2)은 15일 시의회에서 “서울의 경우 25개 구청이 수화통역사를 고용하고 야간 및 주말 당직제도를 활용해 적극 대처하고 있는데 대전의 경우 수화통역 요원들이 대부분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기 때문에 야간이나 주말, 공휴일에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청각장애인들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라며 “대전시도 24시간 수화통역 시스템을 조속히 구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에 이재관 대전시장 권한대행은 “청각장애인들이 의사소통의 문제 때문에 위험이나 불이익에 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서울시 사례를 벤치마킹해 수화통역 직원 충원 등으로 24시간 조력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도록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청각장애인#24시간 수화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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