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숙인 김정은 쇼일까? 진심일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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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집권 6년]핵 무장화 직진이냐… 일단 멈춤이냐… 갈림길에 선 김정은

 북한 김정은에게 2017년은 집권 이후 가장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최고의 시절이 될 수도, 최악의 시절이 될 수도 있다. 희망의 봄이 올 수도, 절망의 겨울이 올 수도 있다.

 대외 환경은 김정은에게 나쁘지 않다.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출범한다. 트럼프 당선인은 흥정이 가능한 상대다. 남한에선 ‘북한 붕괴’를 외치던 보수 세력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여파로 상당히 위축됐다. 

 반면 나쁜 소식도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확실성’이라는 자신의 가장 큰 무기를 잃게 됐다. 그 무기는 이제 트럼프의 손에 넘어갔다. 트럼프가 언제 분노를 터뜨리고 어떤 일을 벌일지 가늠하기 어렵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나빠지고 있는 경제 사정도 김정은에게 큰 부담이다.

 김정은이 장기 집권을 하기 위해서는 핵무기와 민심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는 카드이지만 둘 다 가지려 하다가는 모두 놓칠 가능성이 높다. 이제 김정은은 핵 무장화의 마지막 직선주로를 계속 뛰어갈지, 아니면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가다듬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2017년 김정은은 어떤 카드를 뽑아 들까. 최근 눈길을 끈 몇 가지 장면을 통해 김정은의 깊은 고뇌를 풀어본다.

장면1: 새해 첫날부터 머리 숙인 김정은


 
2017년 1월 1일=새해 첫날 오전 TV를 통해 김정은의 신년사를 지켜보던 북한 주민들은 뜻밖의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정은이 신년사 끝에 갑자기 자아 반성을 하고 새로운 맹세를 다지며 머리를 숙인 것이다.

 “우리 인민을 어떻게 하면 신성히, 더 높이 떠받들 수 있겠는가 하는 근심으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는데 … 나는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우리 인민을 충직하게 받들어 나가는 인민의 참된 충복, 충실한 심부름꾼이 될 것을 새해의 이 아침에 엄숙히 맹약하는 바입니다.”

 북한 주민들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김정은은 갑자기 왜 이런 모습을 보여야 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북한의 민심 동향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김정은은 집권 첫해인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두 달 뒤인 6월 28일 시장 경제적 요소가 담긴 파격적 경제개혁 조치를 선언했다. 이어 경제특구 24개가 차례로 발표됐고, 농업개혁 조치도 나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첫 연설 이후 5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경제는 전혀 회생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경제특구도 유명무실해졌다.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하는 등 공포통치로 독재자의 이미지는 부각됐고 주민 통제와 수탈은 더 강화됐다. 핵실험에 따른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북제재 조치로 북한의 경제 전망은 어둡다.

 한 탈북 엘리트는 이렇게 말했다.

 “김정은 집권 3년과 5년은 새로운 민심의 변곡점이다. 초기 3년은 기대만 심어주면 됐다. 김정은이 갑자기 잘살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도 안다. 그러나 3년이 지나서도 달라진 것이 없다면 사람들은 ‘과연 김정은이 우리를 잘살게 만들 수 있을까’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시점에도 변화가 없다면 ‘이젠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해 김정은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바로 그런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김정은이 새해 첫날 머리를 숙인 것은 민심을 얻기 위한 파격 행보다. 그러나 ‘쇼’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젠 정말 민생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장면2: “문을 닫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겠다”


 
2016년 11월 17일=트럼프 당선 후 일주일 남짓 지난 시점에 최선희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이 장일훈 유엔 주재 차석대사를 대동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나타났다. 미국의 대북 전문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따르면 최선희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윤곽이 드러나기 전에는 미북 관계 개선 혹은 협상 가능성에 대해 “문을 닫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겠다”면서 이런 입장을 트럼프 측에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등 도발을 자제하겠으니 협상을 해보자는 뜻으로 보인다. 또 최선희는 트럼프 행정부의 초기 대북정책 재검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를 수차례 미국 측에 문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급함이 읽히는 대목이다.

 최선희는 북한의 대미정책을 결정하는 핵심 위치에 있다.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외무성 미국국은 대미정책의 1안, 2안을 김정은에게 올려 보내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 결론까지 내서 올려 보낸다”며 “이런 정책 결정에는 노동당도, 군부도 전혀 관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쯤 김정은의 집무실 책상에는 향후 대미정책을 담은 외무성의 극비 문서가 놓여 있을 것이다.

장면3: 삼지연에서 내린 김정은의 결단은


 2016년 11월 27일=김정은이 양강도 삼지연군의 별장에서 3박 4일간의 고심을 끝낸 뒤 최룡해 노동당 부위원장 등을 대동하고 눈이 쌓인 김정일 동상 앞에 섰다. 3년 전과 판박이이다. 2013년 11월 30일 측근 8명과 함께 삼지연에서 비밀회합을 가진 김정은은 눈이 쌓인 김정일 동상을 참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자마자 전광석화처럼 장성택을 처형했다.

 김정은이 나타난 시점은 미국에서 트럼프 당선이 발표되고, 남쪽에선 박근혜 정부가 위기에 몰려 있던 때였다. 이 시점에 김정은은 삼지연에서 무슨 결심을 했을까.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은은 이날 김정일 동상 앞에서 “천지풍파가 몰아치고 세상이 천만 번 변한다고 해도 우리 장군님께서 한평생 높이 추켜드셨던 혁명의 붉은 기를 절대로 놓지 말고 장군님의 염원대로 이 땅에 부강 번영하는 인민의 낙원, 사회주의 강대국을 반드시 일떠세우자”고 말했다.

 핵무기 개발은 김정일의 유훈인 만큼 미국과 한국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핵 개발은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로 들어서는 순간 ‘인민의 낙원’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는 점은 김정은도 안다. 김정은이 핵을 선택했는지, 민심을 선택했는지는 올해 북한의 행보가 알려줄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북한#신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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