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미 리 옹 157cm 작은 거인, 천국의 다이빙대 오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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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사상 첫 다이빙 2연패’ 한국계 미국인 새미 리 옹 96세로 타계

 “한국에서 열리는 겨울올림픽을 보는 게 마지막 소원입니다. 그러려면 오래 살아야지요.”

 강원 평창이 처음 겨울올림픽 유치에 나섰던 2003년. 한국계 미국인 다이빙 영웅 새미 리 옹(당시 83세)은 평창의 2010년 겨울올림픽 유치를 돕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만약 한국이 2010년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면(2010년 올림픽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최) 그는 마지막 소원을 이뤘을 터. 재수에 성공했어도(2014년 올림픽은 러시아 소치에서 개최) 한국에서 열린 겨울올림픽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3수에 성공한 2018 평창 올림픽을 14개월 앞두고 그는 눈을 감았다. AP통신과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등 외신들은 새미 리 옹이 3일 타계했다고 4일 보도했다. 향년 96세.

 키 157cm의 단신이었던 고인은 미국 올림픽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 다이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인’이었다. 올림픽 사상 최초로 다이빙에서 2연패를 이뤘고, 이비인후과 전문의로도 활동한 그는 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딛고 우뚝 선 영웅이었다.

 그는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프레즈노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앞두고 온 도시가 올림픽 열풍에 휩싸였을 때 스포츠에 흥미를 느꼈고, 친구와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다이빙의 매력에 눈을 떴다. 하지만 선수가 되려는 그의 앞에 놓인 현실은 차가웠다. 당시 그가 다니던 수영장은 일주일에 한 번, 물을 교체하기 전날인 수요일에만 유색인종에게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유색인종은 더럽다며 수영장 측은 내가 연습을 끝내면 물을 새로 받았다. 그 덕분에 다른 선수들은 깨끗한 물로 수영할 수 있었다”며 유머로 승화했다. 이 때문에 그는 평소에는 모래사장 위에 설치된 다이빙 보드에서 훈련을 했다.

 20세 무렵 그의 다이빙 실력은 미국에서 당할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1940년, 1944년 올림픽이 취소되면서 28세였던 1948년 런던 대회에서야 겨우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다. 런던 올림픽에서 그는 남자 10m 플랫폼 금메달과 3m 스프링보드 동메달을 땄다. 1947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USC)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이 된 그는 한 달 휴가를 받아 훈련을 하고도 우승을 차지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 하지만 군은 그에게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는 게 더 낫겠다는 의사를 전했고, 32세였던 그해 헬싱키 올림픽 남자 10m 플랫폼에서 다시 한 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 다이빙 사상 최초의 2연패였다. 그는 이듬해 아시아계로는 처음으로 미국 최고의 아마추어 선수에게 수여하는 설리번상을 받았다. 그는 1953년부터 1955년까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군의관으로도 활동했다. 그가 미국 대표로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면서 착용한 운동복, 모자와 수영복은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고, 2012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501호로 지정됐다.

 그는 선수에서 은퇴한 뒤 지도자로서도 성공을 거뒀다. 1960년 로마,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팀을 이끌었고, 그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2연패에 성공한 밥 웹스터와 올림픽에서만 4개의 금메달을 딴 그레그 루게이니스 등 세계적인 스타들을 길러냈다.

 미국 한인 사회에서 이민 영웅으로 추앙받아온 그는 2010년에는 ‘제5회 자랑스러운 한국인상’을, 2013년에는 한미우호단체가 주는 ‘올해의 미국 한인 영웅상’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새미 리 광장’이 있고, 또 웨스트모어랜드 애비뉴에는 ‘새미 리 박사 매그닛 초등학교’가 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새미 리 옹#다이빙#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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