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정운호 뇌물’ 부장판사 구속…대한민국 法治가 무너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3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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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로부터 1억7000만 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인천지법 김수천 부장판사가 어제 구속됐다. 김 부장판사는 네이처리퍼블릭 상품을 위조한 상표법 위반 사건에서 유리한 판결을 해주는 대가로 고가의 외제차 레인지로버를 뇌물로 받고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으며, 500만 원을 수표로 받은 적도 있다. 부장판사 구속은 2006년 법조 브로커에게 금품을 받은 조관행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 이후 10년 만이다.

정 씨 사건으로 드러난 법조 비리에 이미 6월 ‘재판 공정성 우려에 대한 대책’까지 발표했던 대법원은 어제 김 부장판사 구속 직후 “이번 사건은 사법부 전체의 과오이자 잘못임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공식 사과했다. 일반 공무원이 뇌물을 받고 내린 결정은 판사가 바로잡을 기회라도 있지만 판사가 뇌물 받고 내린 판결은 바로잡기 어렵다. 그래서 국가는 법관에게 고도의 청렴성을 요구하는 대신 일반 공무원보다 높은 직급을 부여하고 있다. 판사, 그것도 부장판사의 수뢰가 보통 공무원의 수뢰보다 충격적인 이유다.

김 부장판사의 억대 수뢰는 정 씨와 부장판사 출신의 최유정 변호사 간 수임료 분쟁만 없었다면 그냥 덮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 씨의 해외도박 사건과 관련해서만 검사장 출신의 홍만표 변호사, 법조 브로커 이민희 씨, 서울중앙지검 김모 수사관의 비리가 줄줄이 나왔다. 서울고검 박모 검사도 1억 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우연히 드러난 게 이 정도라면 법조계 곳곳에 숨겨진 비리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미국 법학자 로스코 파운드는 ‘법원이 정의와 형평을 실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원이 정의와 형평을 실현하는 곳이라고 국민이 신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법원 판결이나 검찰 수사가 피고인의 돈과 전관 변호사의 로비에 좌우된 것은 대한민국 법치주의가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다. 법치주의를 통해 국민의 자유와 생명, 재산을 보호해야 할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는 위험한 단계로 가고 있다는 증후다.

더욱이 최 변호사와 홍 변호사에 대해 현직 판검사들이 바친 ‘전관예우(前官禮遇)’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검찰은 검사와 판사 한 명씩을 구속하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하려는 듯 보인다. 이 정도로 균형을 맞추는 선에서 ‘정운호 게이트’ 수사를 마무리한다면 박근혜 정부는 법치를 무너뜨린 정권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

이제 전관예우라는 용어는 사라져야 한다. 변호사가 판검사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현직 판검사까지 법치를 우롱하는 것은 예우가 아니라 범죄행위일 뿐이다. 맨손으로 기업을 일으킨 정 씨의 돈에 이 나라 최고 엘리트인 법조계가 무릎을 꿇고도 ‘전관범죄’를 뿌리 뽑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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