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와의 싸움서도 굳건한 우리 시대 ‘지성의 참모총장’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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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어떻게?]요양원 생활 중 전집 10권 출간 박이문 교수

부인과 함께 방문한 노인요양원… 생일축가에 “해피 벌쓰데이” 화답
자신의 전집 양손으로 잡고 펼치니 오랜 독서가로서의 ‘각’ 되살아나
고향집 더듬은 예전의 시 읽자 담담했던 老교수의 눈가 촉촉해져

2010년 자택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박이문 포스텍 명예교수. 지난달 26일 노인요양원에서 만난 박 교수는 자신이 세운 지성의 성채를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였다. 아내 유영숙 씨는 “남편이 다 비워낸 것 같다”고 했다. 유영숙 씨 제공
2010년 자택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박이문 포스텍 명예교수. 지난달 26일 노인요양원에서 만난 박 교수는 자신이 세운 지성의 성채를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였다. 아내 유영숙 씨는 “남편이 다 비워낸 것 같다”고 했다. 유영숙 씨 제공
《 혹자는 방을 밝히는 전구가 갑자기 나가는 것에 비유하고, 또 다른 이는 끝 모를 어둠을 헤매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한다. 철학자, 시인으로 100권이 넘는 저서를 내며 우리 시대 ‘지성의 참모총장’이 되려 했던 사상가 박이문 포스텍 명예교수(86)가 지난해 6월부터 노인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햇살이 좋았던 지난달 26일 그의 부인 유영숙 씨(73)와 경기 고양시의 요양원을 찾았다. 》

“마침내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더니/막다른 골목/뒤돌아서니 별안간 아찔하게 깊은/낭떠러지 … 가도 가도 험악한 함정만 같은/빠져나오면 더 빠져들어가는/시궁창 같은/삶의 깨어나지 않는 악몽을 꾼다.”(박이문 ‘악몽’ 중)

가는 차 안에서 기자는 박 교수의 병세가 그의 시와 같지 않기를 바랐다. 황혼. 자신이 쌓은 거대한 지성의 성채 꼭대기에 첨탑을 또 세우려 들 수도, 성벽 위에서 느긋하게 저무는 해를 바라볼 수도 있는 시간이다.

요양원은 깨끗했다. 박 교수는 환자복 위에 조끼를 입고 있었다. 볼이 아주 홀쭉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만한 느낌까지 줬던 과거 사진 속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달랐다. “동아일보 기자예요! 교수님 전집(미다스북스)이 이번에 10권으로 나와서 찾아뵀어요!” “아, 동아일보….”

“여보, 생일 축하해요!”

부인과 기자는 함께 축하 노래를 불렀다. 박 교수는 “해피 벌쓰데이”라고 말했지만 초를 불지 않았다. 기자는 박 교수가 예전에 쓴 시를 소리내 읽었다.

“4월, 아직 오후는 서늘하고/숲에도 초록빛이 들지 않았다/연못가에는 젊은이와 노인 몇이/낚싯대를 연못에 드리운 채/말없이 고요히 물결만 바라보고 있었다/얼마나 잡힐지 신경 쓰는 친구는 없어 보였다.”(‘월든 호수에서’ 중)

“여보, ‘walden pond’ 기억나요? 좋아했었잖아요?”

박 교수는 1982년 망막박리라는 병으로 오른쪽 시력을 사실상 잃었다. 그해 유 씨와 결혼했고 이듬해 미국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선임연구원이 됐다.

“나도 보스턴은 처음이었거든요. 내가 자동차 조수석에 앉자마자 남편이 학교 약도를 저에게 준 뒤 ‘(길) 알지?’, 그러는 거예요. 원래도 현실적인 일상의 일은 잘하시는 편이 아니거든요.”

부부는 미국 하버드대 시절 자연의 일부가 되는 삶을 예찬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수’가 태어난 곳에 종종 함께 놀러갔다. 재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박 교수의 병세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박 교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했다. 헌데 썼던 글을 또 쓰는 일이 많아지자 유 씨가 ‘이제 그만 쓰라’고 했다.

“50년전 떠났던 고향/그때보다도 더 초라해 시골 마을/한적한 동네 한복판/궁전같이 크기만 했던 기와집은/아버지가 태어나고/그리고 또/우리 형제자매가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던 곳.”(‘남이 살고 있는 고향집’ 중)

이 시를 읽자 박 교수의 눈이 촉촉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시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줌니, 떡 갖고 왔시유∼!”

이때 박 교수 집의 가사를 오래 도와준 아주머니가 옆에서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말했다. 박 교수의 얼굴이 밝아지며 “아산…”이라고 했다.

시 몇 수를 더 읽었다. 기자의 손을 잡고 있던 박 교수가 양손으로 자신의 전집을 펼쳤다. 손의 모양새에서 오랜 독서가의 ‘각’이 엄연했다. 당당한 왕년의 사진 속 표정이 되살아났지만 잠시였다.

“예전에 남편한테 다시 태어나면 뭘 하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공부를 다시 하겠다’고 하더군요. 대학 다닐 때가 전란 중이어서 엉터리로 지나갔다며. 그래도 운이 좋아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했어요.”

사실 부인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여러 병을 앓고 있다. 문병을 마친 뒤 귀가한 그는 자택에서 30분가량 침대에 누워 말하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살면서 항상 겉과 속이 같은 분이었어요. 물론 현실적이지 않아서 남편한테 기대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는 화가 난 적도 있었죠. 그래도 남편은 살면서 화를 한 번도 안 냈어요. 아기 같았어요.”

유 씨와 헤어진 뒤 요양원의 부부 모습이 떠올랐다. 한 시를 읽자 부인은 끝내 고개를 숙였다.

“우리들의 육체는 먼지/우리들의 삶은 꿈/우리들의 사랑은 환상/우리들의 행복은 바람/그래서/우리들의 실체는 이 먼지뿐/우리들의 꽃은 사랑뿐/우리들의 영원은 이 바람뿐/우리들의 천당은 여기뿐/고통과 슬픔에 가득 찬/여기, 지금뿐/지금 느끼는/이 느낌뿐/쓰고 단.”(박이문 ‘우리들의 천당은’ 중)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박이문 교수#노인요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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