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석의 시간여행]법마저 외면했던 한국 가부장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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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

아동학대 방지를 촉구한 동아일보 특집기사의 제목(1935년 2월 9일자).
아동학대 방지를 촉구한 동아일보 특집기사의 제목(1935년 2월 9일자).
‘이쁜이 아빠/또 술주정/와지끈 뚝닥/세간 빻고/마루 우에 가/털석 앉아/이년! 이년!/욕만 하네/저녁밥 짓는 이쁜이 엄마/훌쩍 훌쩍 눈물짓고/부지깽이로 개 때리니/깨갱 깽깽깽 달아난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21일자)

92년 전 신문 맨 끝머리에 실린 ‘동요’ 한 편이다. 제목은 ‘술주정’. 지금의 가정폭력 및 아동학대 사례에 등장하는 요소를 거의 다 갖추고 있다. 주로 취중에 상습적으로 자행, 서민층에 많이 발생, 어린 자녀가 보는 데서 욕설 협박 공포감 조성, 흉기 휘두름 등등. 하지만 당시의 이 장면은 인권 침해에 대한 고발 같은 것과는 무관하고 단지 그 시절 보통 가정의 평범한 일상을 묘사한 것이다. 동요 작가는 연극과 문예 전반에 통달하고 곧 영화에도 뛰어들어 나운규를 데뷔시킨 스무 살의 인텔리 종합대중예술인 이경손이었다.

이 동요는 일제강점기까지 면면히 내려오는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 풍속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가정환경은 일제 통치라는 특수한 조건하의 조선 사회 형편과도 유사하다. 권력의 일방적인 전횡 앞에 무력하게 방치된 존재. 그런 점에서 엄마와 아이, 그리고 개는 일제 치하의 조선인 일반의 삶과 동격이라 할 만하다. 가정이란 밀실에서 아내와 아이를 부속물 취급하며 폭군처럼 구는 아비 역시 집 밖에서는 또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무력한 조선인의 한 명이겠지만.

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1920년대에도 조선 500년 전통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던 이 같은 가정 풍경은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1930년대의 신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 아동들처럼 매 많이 맞는 아동들이 또 있을까. 조선 아동처럼 먹을 것을 못 먹고 입을 것을 못 입는 아동들이 또 있을까. 조선 아동들처럼 받아야 할 교육을 못 받는 아동이 또 있을까. 조선 아동들처럼 인권의 유린을 받는 아동이 또 있을까. 조선 아동들은 세계에서 가장 학대를 많이 받는 아동이다.’(동아일보 1932년 9월 25일자)

일본 도쿄의 의회에서 아동학대방지법안이 조만간 상정된다는 소식에 즈음한 1면 머리 사설이다. 14세 미만의 아동을 체형이나 부당노동 강요 등으로 학대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설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아동학대방지법안이 통과되면 조선에서도 실시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필요로 본다면 아동학대가 심하기로 첫손에 꼽힐 만한 조선에 있어서 한층 절실하다. 전통적으로 자손은 그 친권자의 사유재산같이 인정되었다. 친권자는 자손에게 대하여 절대적 권리를 가졌다. 심하게는 자손의 생사까지도 마음대로 결정지었다.’

왕조 시대가 소멸한 이후에도 가정은 가부장제를 존속하며 저마다 작은 왕조국가 꼴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동학대방지법은 20세기 들어 영국과 미국을 필두로 법제화되어 1913년 아동보호국제위원회 창립으로 국제적으로 통용됐다. 일본에서는 1933년 말부터 시행되었고, 조선에서는 1935년 한때 시행이 논의되다가 끝내 적용되지 않았다.

‘6백만 소년소녀의 운명이 더 한층 가엽다.’ 사설은 그렇게 안타까워했지만 상황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져 2014년에 관련 특례법의 시행을 보기에 이르렀다. 요즘은 아동보호기관에서도 가정에서도 무사 안전을 보장받기 힘든 아동 인권의 실상이 속속 드러나는 시절이다.

아동학대는 가족 해체뿐 아니라 가족 이기주의에 맥이 닿아 있다. 우리 집안 문제니까 간섭 말라는 것, 내 자식이니까 상관할 것 없다는 것. 사생활 보호를 방호벽으로 내세워 법질서조차 거부하는 한국적 역설이 거기서 일어난다. 자식이라는 개인을 부모의 소속원으로 여기는 것은 100년 전과 변함이 없으면서, 강요와 간섭을 월권 아닌 애정이라 포장하거나 착각하는 21세기형 가부장제라 할까. 이번 설에 다들 모여 앉은 자리에서, 저급한 나라 정치의 질 문제 외에 가족의 건강성 문제에 대해서도 집집마다 의논들이 혹시 있었는지 모르겠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가부장제#아동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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