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유종]이탈리아의 ‘쟁이’ 기업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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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종 국제부 기자
이유종 국제부 기자
‘뎅∼.’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아뇨네에서 묵직하지만 청아한 종소리가 울렸다.

마리넬리 형제가 새로 제작한 종을 시험 삼아 치는 소리다. 마리넬리 가문은 11세기부터 교회 종을 만들기 시작해 무려 1000년 동안이나 교황청에 납품해 오고 있다. 피사의 사탑과 뉴욕 유엔 본부에도 걸려 있다.

형제는 직원 10명과 함께 전통 방식으로 연간 50개의 종을 만들고 있는데 심금을 울린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탈리아에는 마리넬리 같은 장인기업이 140만 개나 존재한다. 95%는 종업원이 10명 미만이다. 이탈리아는 약 290만 명이 이런 기업에서 일하며 국내총생산(GDP)의 12%를 차지한다.

마리넬리는 끊임없이 종소리를 연구한다. 종 형태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에 장인들은 음악과 디자인까지 배우며 최고의 종소리를 추구한다. 기술 전수도 생존의 주요 요소다. 어린 시절 마리넬리 형제에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주조 공장이 놀이터였다. 자연스럽게 벽돌 제작, 목수, 디자인, 조각, 판매 등의 일을 배우며 가업을 이어받았다. 자녀들도 나폴리미술아카데미 등에 다니며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3만7000여 기업이 문을 닫는 불황이 닥쳤을 때에도 마리넬리는 고객층을 다양하게 넓히는 것으로 활로를 찾았다. 교회 종에 안주하지 않고 직접 세계시장을 누빈 것. 그 결과 고객층을 일본의 삿포로스포츠센터까지 넓힐 수 있었다. 현재 매출액 중 수출 비중은 20%에 달한다. 불과 10년 전보다 4배 늘었다.

이탈리아 장인들은 중세 유럽의 길드와 같은 동업자 조직을 운영하며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고 일감도 분배한다. 생산시설을 확장하지 않아도 협업만으로 대량 주문을 받을 수 있다. 이탈리아에는 전국에 걸쳐 72곳에 장인기업 클러스터가 조성돼 있다. 이탈리아 정부는 가업승계 장인기업이 순조롭게 이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일정 요건을 갖추면 상속세를 면제해 주는 식이다. 금융기관들도 장인기업들이 공방 현대화, 증설 등을 추진할 때엔 저리에 돈을 빌려주고 있다. 이런 지원책으로 소규모의 장인기업들이 높은 기술력을 무기로 대기업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할 수 있었다.

장인이 사라진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장인의 기술은 모든 산업 기술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뿌리가 부실하면 국가 산업은 제대로 성장하기 어렵다. 또 장인기업이 모인 동네 공장부터 살아나야 지역 일자리가 창출되고 중산층도 튼실해진다. 장인기업은 가족이 구성원이라 기업 가치관과 비전이 쉽게 공유돼 안정적인 성장이 가능하다. 국가 경제 기여도가 적지 않다.

국민 소득이 늘면 명품 수요도 늘어난다. 고급스러운 장인의 기술이 사라지기 전에 이제 가업으로 이어가는 장인기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근면성, 끈기, 도전정신이 강한 한국인에게 오랜 시간 이어가야 하는 장인의 업(業)은 해볼 만한 과제다.

이유종 국제부 기자 pen@donga.com
#이탈리아#쟁이#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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