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이 어제와 그제 이틀 연속 판문점에서 고위급 접촉을 가졌다. 김관진 대통령국가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 북의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양건 노동당 대남 비서는 북한의 포격 도발 등 현안에 대해 마라톤 협상을 벌였으나 좀처럼 견해차를 좁히진 못했다. 남과 북의 핵심 실세들이 머리를 맞댄 이번 접촉은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의 대리인이 협상에 나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번 접촉에서 남북은 상당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우리 측은 북의 지뢰 도발과 포격 도발에 대해 사과와 재발 방지 등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북은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우리 군이 11년 만에 재개한 대북 확성기 방송의 중단을 요구했다. 우리 측이 이를 수용하면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비무장지대(DMZ) 내 세계생태평화공원 조성, 이산가족 전면 생사 확인 등을 논의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북은 최근 우리 측이 이산가족상봉과 금강산관광 재개를 논의하기 위한 고위급 대화를 갖자고 제안하는 서신을 수령하는 것조차 거부했지만 이번엔 다급했던지 태도를 바꾸었다.
북은 대화에 나서면서도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높이는 양면 전술을 구사했다. 북이 보유한 잠수함의 70%인 50여 척이 동해와 서해의 기지를 떠나 위치 파악이 안 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북 잠수함의 대규모 기동은 전면전에 대비하는 것으로 해석될 만큼 심상치 않은 동향이다. 공산주의자들이 협상을 혁명 투쟁의 한 방편으로 삼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상황이 유리하면 무력공세로 나오고 불리하면 협상에 나서 시간을 벌면서 여론을 호도하고, 또 다른 공격의 계기를 모색한다.
이에 맞서 우리는 북으로부터 도발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명시적인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 북의 모호한 유감 표명이나 사과로 어물쩍 이번 사태를 봉합할 경우 북의 패악을 바로잡을 수 없다.
북은 당초 그제 오후 5시까지 대북심리전 방송을 중지하지 않을 경우 군사행동에 돌입하겠다고 최후통첩을 해놓고 막후에서 대화를 제의해 왔다. 21일 오후 김양건 비서 명의로 김관진 실장과의 접촉을 제안했다가 우리가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대신 나올 것을 요구하자 22일 두 사람이 동시에 나올 테니 우리 쪽에서도 김 실장과 홍 장관이 나올 것을 제안했고 우리 측이 최종 수용했다.
이번 접촉을 북 주민에게 알리며 ‘대한민국’이라는 표현도 2007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처음 사용했다. 북의 지뢰 도발에는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로, 포격 도발엔 155mm 자주포 29발 포격으로 대응하며 우리가 단호히 맞서자 일단 꼬리를 내리는 척한 것이지만 진심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남북이 대화를 통해 현 상황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의 선의만으로는 북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북이 협상 테이블에 나온 것은 대북 확성기 방송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10일 재개된 대북 방송은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까지 중국만 3번 방문했지만 김정은은 단 한 번도 순방은커녕 외국 관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파했다. 북의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진실이다. 거짓과 기만으로 주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독재 정권을 유지하는 북으로선 김정은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는 외부 정보의 유입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북이 반발한다고 해서 이번 도발에 대한 북의 사과나 재발 방지 약속도 받지 않고 대북 확성기 가동 등 심리전을 중단한다면 북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다.
굳건한 한미동맹도 북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미국은 을지프리덤가디언 한미 군사연습 기간 중 발생한 북의 도발에 대해 “동맹국인 한국과 한 몸으로 대처할 것”이라며 강력히 경고했다. 북이 가장 두려워한다는 B-2 스텔스 폭격기가 괌에 배치됐고, 한미 전투기들이 그제 합동으로 한반도 상공에서 무력시위를 한 것도 북에 커다란 압박이 됐을 것이다. 미국은 대북 감시 태세인 ‘워치콘’을 3단계에서 2단계로 격상해 북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다. 북의 도발은 한미동맹이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자 대한민국의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북 외무성이 21일 성명에서 중국을 겨냥해 “지금에 와서 그 누구의 그 어떤 자제 타령도 더는 정세 관리에 도움을 줄 수 없게 됐다”고 비판해 중국도 북을 설득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북-중 관계가 예전 같지 않지만 북이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병풍 노릇을 하는 중국의 자제 요구를 마냥 외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다음 달 3일 전승절 행사에 박 대통령을 초청한 중국은 대규모 경축 행사를 앞두고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남북이 박 대통령과 김정은을 각각 측근에서 보좌하는 핵심라인 사이에 대화 채널을 구축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 협상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의 대응 태세에 허점이 보이면 북은 언제든 도발로 돌아설 수 있다. 북이 도발하면 후회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강력하게 응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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