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형주]‘램프를 든 여인’의 위대한 질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4일 03시 00분


코멘트

40만명이 죽어나간 전쟁터서 각종 통계 모은 나이팅게일
병원 사망률 42%를 2%로 낮춰
수학교육은 수학자 양성 아닌 통찰력, 논리적 사고 키우는 과정
입시용 문제 풀기 수업만으론 교과서 내용 20% 줄인다고
‘수포자’ 줄어들지 않는다

박형주 포스텍 수학과 교수
박형주 포스텍 수학과 교수
감염병으로 인한 혼란과 미숙한 대처를 보며 문득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떠올렸다. 늦은 시각 홀로 야전병상을 돌던 이 간호사를 롱펠로의 시 ‘산타 필로메나’는 ‘램프를 든 여인’이라 칭했다. 1854년 크림 전쟁에 참전한 그녀는 40만 명이 사망한 전장에서 물었다. 왜 전쟁터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야 하나? 결국 그녀는 당시 영국군 야전병원 사망률 42%를 2%로 낮췄다. 1000명 중에 죽어야 할 400명이 살게 됐고, 먼 전쟁터에 자식을 보낸 영국인들은 그녀를 성녀와 동급으로 여겼다. 지극한 헌신이 기적을 일으킨 걸까?

어릴 때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던 나이팅게일은 전쟁터에서 각종 통계를 모아 분석했다. 총상 때문이 아니라 야전병원의 비위생적 환경과 오염된 물 때문에 병을 얻어 죽는 이가 대부분임을 간파했다. 상식에 반하는 결론을 내리고는 복잡한 통계 데이터를 쉬운 그림으로 보여주는 ‘나이팅게일 장미 다이어그램’을 창안했다. 요즘 뉴스에서 통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파이차트와 비슷하다.

그녀는 더 타임지에 서신을 보내 야전병원의 문제를 설명하고 도움을 호소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부인할 수 없는 데이터의 명징성과 탁월한 설득의 힘으로 여론이 들끓자 영국 정부는 조립 위생병동을 제작해서 전쟁터로 보냈고 각종 위생 정책을 시행했다. 기부금이 몰려들어서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녀는 세계 최초의 간호학교를 만들 수 있었다. 공중보건에 통계학의 역할을 정립하여 영국왕립통계학회의 첫 여성 회원이 되었고 위대한 통계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한 우물이 아니라 여러 우물을 파는 사람이 시대를 이끈다. 동질의 융합보다는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과 상호극복이 판을 바꾼다. 인문학과 과학이 그러하다. 간호사는 약간의 의학 지식과 헌신만 있으면 된다고 하던 19세기에, 데이터와 수학으로 공중보건의 개념을 뒤집은 나이팅게일은 시대의 판을 바꾼 혁신가였다.

게오르크 칸토어는 수학의 본질이 자유로움에 있다고 했다. 공식의 기계적 적용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보고 해결 방안을 찾음을 뜻한다. 전쟁터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을 보고 그저 가슴 아파하지 않고, 혼란스러운 숫자들에 불과한 데이터에서 그 숨은 의미를 읽어내는 통찰이 그렇다.

청소년에게 수학이 무엇인가의 실마리는 21세기가 지식의 시대가 아니라는 역설에 있다. 새로운 지식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곧 낡은 지식이 되니 얼마나 아는가는 덜 중요해졌다. 시대의 변화를 읽고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능력이, 논리적 사고가, 그래서 중요하다.

수학교육은 수학자를 길러냄도 천재를 위함도 아니다. 생각의 재료를 주고 이를 버무리는 사고의 훈련 과정이다. 명료함으로 감동을 전달하는 문학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언어학의 놈 촘스키, 데이터로 신뢰할 만한 결정을 해내는 경영의 래리 페이지를 기대함이다.

많은 청소년이 수학을 포기한다고 한다. 아이들은 수학 개념의 탄생 배경이나 미래 세상에서의 역할은 모르는 채, 반복해서 문제나 풀며 입시 대비나 하라는 어른들 얘기를 듣는다. 이래서야 수포자가 안 되는 게 신기하다.

이런 무책임한 교육 방식은 논외로 하고, 덜 가르치면 해결될 거라고, 아예 교육과정의 내용을 20% 일률 삭감한다고 한다. ‘국문과에 갈 건데 왜 미적분을’, ‘부모님은 수학 모르고 잘 사셨다’는 말이 상식의 얼굴을 하고 회자된다.

교과 내용은 생각의 재료다. 기본적인 논리적 사고를 위한 재료를 미달하게 주고는 미래 세상에서 알아서 살라고 하는 꼴이다. ‘묻지 마 삭감’을 하면, 아이들은 빤한 내용을 끝없이 반복 학습하고도 신문의 데이터를 남이 해석해 주어야 하는 ‘반쪽짜리’ 지식인이 된다. 입시에서 실수 하나로 인생이 바뀐다. ‘실수 안 하기 사교육’이 유행하고 모험은 사치가 된다. 내용을 줄여도 흥미진진하게 가르치지 않으니 여전히 수학은 재미없다.

뺄 게 아니라, 스토리를 더하고 의미의 생명력을 부여해야 한다. 수학 개념이 탄생한 시대적 상황과 역사도 가르치자. 문제 수는 줄이고, 문제는 꼬지 말고 평이하게, 평가는 실수를 해도 부분점수를 주는 서술식으로 해서, 아이들의 좌절을 줄여줘야 한다. 어차피 남는 건 그 자잘한 지식이 아니고, 할 수 있었다는 성취감, 그리고 더 어려운 것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아닌가.

박형주 포스텍 수학과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