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심장부 도쿄서 독립선언… 획기적 발상”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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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근촌 백관수 선생 생애 조명 학술 심포지엄

전현직 중진 언론인들의 모임인 서울언론인클럽은 2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동아일보 7대 사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근촌 백관수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조명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왼쪽부터 여영무 박실 남시욱 신복룡 정진석 씨.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전현직 중진 언론인들의 모임인 서울언론인클럽은 2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동아일보 7대 사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근촌 백관수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조명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왼쪽부터 여영무 박실 남시욱 신복룡 정진석 씨.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자아가 강함. 배일(排日) 사상을 갖고 각종 회합에 참석해 불온한 연설을 함. 잡지에도 불온한 투고를 함.’

근촌 백관수(芹村 白寬洙·1889∼?) 선생에 대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사찰문건 중 일부다. 2·8독립선언과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등에 참여한 근촌을 껄끄럽게 여긴 총독부의 인식이 엿보인다. 전현직 중견 언론인 모임인 서울언론인클럽(회장 강승훈)은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근촌 백관수의 생애와 업적 조명’이란 제목의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심포지엄에는 200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 준비한 좌석이 부족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주제발표에 나선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2·8독립선언에 대해 “젊은 엘리트들이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국제 여론을 움직이려고 한 것은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30세로 재일 유학생 가운데 연장자였던 근촌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400여 명의 학생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등 거사를 주도했다. 2·8독립선언서 초안이 국내로 전달돼 3·1운동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적지 않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근촌은 9개월 동안 징역을 살았다.

안용환 명지대 교수도 ‘2·8독립선언과 근촌 백관수’라는 발표에서 “2·8독립선언 당시 근촌은 춘원 이광수에게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게 하고 최팔용 나용균은 거사 자금을 마련하게 했으며, 송계백은 국내로 잠입시켜 고하 송진우와 인촌 김성수 선생을 만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언론인으로서 근촌의 삶도 조명됐다. 1937년 5월 동아일보 7대 사장에 취임한 근촌은 총독부의 폐간 조치에 맞섰다. 총독부는 ‘언문신문 통제안’이라는 극비 문서를 작성해 1940년 초부터 동아일보의 폐간을 강요했다. 근촌이 폐간을 거부하자 총독부는 동아일보 경리담당 직원들을 구속한 데 이어 고등계 형사들을 신문사로 보내 근촌을 연행했다. 정 교수가 소개한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근촌은 편집국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손으로 동아일보 폐간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결국 총독부는 발행인 겸 편집인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도록 압박해 폐간을 밀어붙였다.

이에 대해 종합토론에서 여영무 뉴스앤피플 대표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는 브나로드운동 등을 적극적으로 벌였는데 근촌은 민족정신을 지키려면 폐간을 막아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공과를 논의한 시도도 있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는 ‘정치인 근촌 백관수의 정치이념’이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백관수의 삶에는 분명 지사적 우국심과 고뇌가 있었다”며 “그러나 그가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가담한 것은 허물이 됐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결전에 나서는 황군의 사기를 진작해야 한다”며 근촌을 비롯한 지식인 24명을 모아 군사후원연맹을 결성했다.

광복 이후 근촌이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한 데 대한 평가도 나왔다. 신 교수는 “1948년의 단정 수립은 한 개인의 결심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성급한 단정 수립으로 분단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단정 수립으로 인한 분단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북한에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종합토론에 참여한 박실 전 의원(전 한국기자협회장)은 “북측에서는 이미 소비에트연방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본 틀이 짜여 있었고 이미 모든 행정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근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미약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홍찬식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은 “국회도서관이 보유한 근촌 관련 자료가 9건에 불과한 반면에 중도 좌파로 분류되는 여운형에 대해선 289건이나 있었다”며 “학계의 관심이 너무 편향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일반 방청객으로 참석한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도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에는 근촌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며 아쉬워했다.

이날 심포지엄에 특별 초청된 황인자 새누리당 의원은 “근촌이 주도한 2·8독립선언은 일제강점기 도쿄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반드시 국가기념일로 지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독립운동가#백관수#학술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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