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유영]모멸의 사회학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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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소비자경제부 기자
김유영 소비자경제부 기자
조현아 전 대항항공 부사장이 일주일이 넘도록 인터넷 포털에서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 때문이다. 그는 미국 CNN과 뉴욕타임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독일 슈피겔 등 세계 유수의 언론까지 관련 보도에 가세하면서 국제적으로도 조롱을 받고 있다. 대한항공의 영문명이 하필 ‘코리안 에어(Korean Air)’인 게 부끄럽다는 사람도 만나봤다.

조 씨를 분노케 한 건 고작 땅콩이었다. 미국 뉴욕에서 인천으로 출발하는 대한항공 KE086편에서 그녀는 승무원이 견과류를 제공하면서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행기를 돌려 책임자인 박창진 사무장을 내리도록 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뉴욕의 JFK공항에 홀로 남겨진 40대 사무장의 심정이 어땠을까. 사무장에게 가한 조 씨의 행동은 업무적인 괴롭힘(work harassment)을 넘어선 인격 학대 혹은 인격 말살에 가까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박 사무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모욕감과 인간적 치욕,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모욕을 퍼붓는 것은 낮은 자존감이나 행복감이 왜곡된 방식으로 표출된 결과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누군가를 모멸하면서 ‘내가 누군지 알아’라며 자신의 힘을 확인하려 든다. 결핍이 남에게 모멸을 가하는 행동을 낳는다는 분석이다. 아파트 경비원에게 막말하는 입주민이나 부당한 계약서를 강요하는 기업, 국감에서 호통부터 치고 보는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 모멸은 넘쳐난다. 조 씨가 이런 모멸의 극한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정작 이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의 결핍을 드러낸 셈이다.

‘모멸의 시대’에 감정은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성숙한 사회일수록 개인의 감정을 다스리고 조절하는 능력이 사회의 품격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사회철학자인 아비샤이 마갈릿은 저서 ‘품위 있는 사회’에서 “자존감이 없으면 가치에 대한 인식도, 인생이 의미 있다는 인식도 가질 수 없다”며 “정의로운 사회가 되려면 인간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품위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사무장이 침묵을 깨고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며 “아, 나는 개가 아니었지. 사람이었지. 나의 자존감을 다시 찾아야겠다”라고 말한 건, 그래서 먹먹했다.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가진 듯한 조 씨가 왜 상대를 깔아뭉개려 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직급이 높아도, 그 누구도 인간의 자존감을 손상시킬 권리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우리가 회사에 다니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지만,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 때문에 회사에 다니기도 한다. 지금보다 더 성숙한 사회에서 살기 위해, 모멸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해야 하는 이유를 조 씨가 던졌다.

김유영 소비자경제부 기자 abc@donga.com
#조현아#모멸#자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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