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보다 2인자… 뒤에 숨어 입김… 더 교묘한 ‘政治 금융’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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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감시 덜한 부회장-부사장-감사 자리에 줄줄이 政피아
거래소-우리銀-기업銀 감사… 금융 경력없는 정치인 출신 선임
민간인 CEO는 얼굴마담 전락
“선진화 외치는 청와대-금융당국… 구시대적 관행으로 시스템 망쳐”

한국 금융계의 오래된 이슈인 ‘관치(官治)금융’ 논란은 현 정부 들어 ‘정치(政治)금융’으로 한 단계 진화하며 더욱 교묘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에 은행장, 협회장 등 최고위직을 정부의 ‘낙하산 인사’가 점령했다면 최근에는 은행장뿐 아니라 부회장, 부사장, 감사, 사외이사 등 대중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자리들까지 정권에 줄을 댄 민간인이나 정치인 출신들의 ‘먹잇감’이 돼 가고 있다는 게 금융권의 불만이다. 은행장, 협회장은 여론의 감시라도 받는다지만 부회장 부사장 등의 자리는 여론의 눈을 피할 수 있고 업무량에 비해 높은 보수를 받는 이른바 ‘꽃 보직’이다.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뒤에서 실권을 휘두를 수도 있다.

정치금융 시대에 낙하산 인사가 낙점되는 과정은 더 퇴행적이다. 아예 회장, 행장 선출기구가 구성되기도 전부터 내정설이 돈다. ‘들러리 후보들’과 ‘거수기 위원회’로 형식은 겨우 지키지만 절차가 끝날 때면 소문이 어김없이 현실이 된다. 관치금융 시대보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는 목소리가 커지는데도 금융당국이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 뒤에서 실력행사

관피아(관료+마피아)의 금융권 취업 통로는 세월호 사태 이후 사실상 봉쇄됐다. 하지만 정치권 출신 낙하산, 즉 ‘정피아(정치인+마피아)’는 되레 활개를 치고 있다. 올 들어 금융사의 감사나 사외이사 자리를 차지한 정피아는 주요 인물만 10여 명에 이른다.

우리은행이 10월 신임 감사로 선임한 정수경 변호사는 ‘정피아’ 논란에 휩싸인 대표적 인물이다. 2008년 총선에서 친박연대 대변인을 맡았던 그는 금융권 근무경력이 전혀 없다. IBK기업은행 감사로 10월 임명된 이수룡 전 신창건설 부사장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캠프에서 활동했다. 앞서 7월에는 권영상 전 새누리당 경남선대위 정책본부장이 한국거래소 감사에, 9월엔 박근혜 대통령 대선캠프에서 활동한 공명재 전 한국거래소 자체평가위원이 수출입은행 상근감사에 선임됐다. 또 산은금융지주의 홍일화 사외이사는 한나라당 부대변인, 산은자산운용의 여해동 사외이사는 한나라당 재경수석전문위원 출신이다.

금융사 감사나 사외이사 자리에 정치인이 대거 투입되는 것은 사장 행장 등 기관장에 가려져 있어 부담이 덜하기 때문이다. 업무는 적은데 권한은 많고 연봉도 후하기 때문에 외부출신 인사가 ‘잠시 쉬어가는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이들은 2인자 또는 3인자 자리에 숨어서 해당 기관에 정부의 의중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도 한다. 권력과 줄을 대고 있는 만큼 기관장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 한다. 최근 내부 출신 인사가 기관장이 된 한 금융사의 고위 관계자는 “최고경영자(CEO)는 얼굴마담 격이고 결국 조직 어딘가에 낙하산이 와서 회사를 멋대로 흔들 것이라는 직원들의 우려가 팽배하다”고 털어놨다.

○ “정부가 오히려 금융 선진화 망쳐”

금융계의 인사 난맥상이 이어지면서 비난의 화살은 청와대와 금융당국에 쏟아지고 있다. 겉으로는 금융 선진화를 외치면서 정작 자신들은 구시대적 인사 관행을 통해 민간 금융사의 지배구조까지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금융당국이 제청한 후보군이 청와대에서 뒤집히는 일이 빈발하고 주요 직책이 장기간 공석(空席)으로 방치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금융위원회가 과거 산하기관 등에 발휘했던 인사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또 부적절한 외압을 걸러주기는커녕 정권의 의중을 금융회사에 전하는 통로 역할만 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이 같은 일들이 지속되면 금융회사의 경영이 낙하산에 멍드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의 신뢰도에도 타격이 갈 것이라고 우려한다. 윤석헌 숭실대 교수는 “내정설이나 낙하산 의혹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도 당국이 부인으로 일관하는 것은 국민들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낙하산이 금융을 망치는 현상은 과거 정권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상빈 한양대 교수는 “세월호 이후 낙하산의 종류만 달라졌을 뿐”이라며 “우리 금융이 더 망가질 수 있어 굉장히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유재동 jarrett@donga.com·장윤정 기자
#금융#관치금융#정치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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