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 시대별 여성상 반영… 바비 탄생 55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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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블릿PC 든 커리어우먼, 바비의 다음 변신이 궁금해

인형 ‘바비’가 탄생 55주년을 맞았다. 29cm의 이 작은 인형은 소녀들의 오랜 장난감 친구이자 당대 여성상의 변천사를 
반영해왔다. 아래는 최신판 커리어우먼 바비(오른쪽 사진), 한복 입은 바비와 외과의사 바비(작은 사진 왼쪽부터). 동아일보DB
인형 ‘바비’가 탄생 55주년을 맞았다. 29cm의 이 작은 인형은 소녀들의 오랜 장난감 친구이자 당대 여성상의 변천사를 반영해왔다. 아래는 최신판 커리어우먼 바비(오른쪽 사진), 한복 입은 바비와 외과의사 바비(작은 사진 왼쪽부터). 동아일보DB
한 손엔 태블릿PC, 다른 손엔 스마트폰을 든 여성이 있다. 여성이 갖고 있는 검은 백은 A4용지 서류가 들어갈 만한 크기다. 무릎 아래 길이의 단정한 정장과 검은 구두를 갖춘 이 여성이 최근 외신에서 큰 화제가 됐다.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이 느닷없이 주목받는다? 이유가 있다. 이 여성이 다름 아닌 ‘바비’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여자 어린이들의 오랜 친구인 플라스틱 인형 얘기다.

플라스틱 천장이 깨지다

개미허리에 풍선 가슴을 가진, 현실에선 유지하기 힘든 몸매의 성인 여성 인형에 대한 여자 어린이들의 열광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1959년부터 팔린 인형을 줄 세우면 지구 네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다. 지금도 세계 어디에선가 1초에 2개씩 팔리는 ‘스테디 베스트셀러’다.

이 히트상품의 최신판인 ‘커리어우먼 바비’가 나오자 여론은 뜨겁게 반겼다. 요즘 활발하게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이자 여자 어린이들이 진짜 따라가야 할 본보기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다. 2014년 선보인 바비의 정장은 여전히 소녀들이 좋아하는 핑크색이지만 앞선 선배 바비들과는 다른 직장 여성의 모습이다.

새로운 바비를 두고 ‘유리 천장’(‘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막는 보이지 않는 벽’을 뜻하는 말)을 빗대어 ‘플라스틱 천장이 깨졌다’는 반응이 나왔다. ‘바비의 린 인’이라는 평도 있었다. ‘린 인’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업체인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셰릴 샌드버그의 저서 ‘린 인(Lean In)’을 가리킨다. 샌드버그는 이 책에서 여성들을 향해 더 높은 꿈과 야망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도록 독려한다. ‘바비의 린 인’이라는 말에는 그만큼 변화하고 격상된 ‘바비상(像)’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커서 무엇이 될까’ 정도만 생각하면서 인형놀이를 해온 소녀들에게 바비가 사회활동의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준다는 것이다.

지나친 의미 부여일까. 탄생 55주년을 맞는 바비 인형은 당대의 여성상을 반영해 왔다. 최신판 바비는 분명 수동적인 미녀에서 벗어나 목표지향적인 현대의 여성상을 추구하고 있다는 게 평론가들의 중론이다.

‘여자’ 인형을 원한 ‘소녀’들

루스 핸들러 씨의 딸 바버라 양은 종이로 인형을 만들어 놀곤 했다. 바버라 양은 종이 인형에 배우나 교사, 간호사 같은 역할을 붙여 갖고 놀았다. 어린이들이 어른 흉내를 내면서 역할 놀이 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어린이들이 갖고 노는 입체 인형은 동물이나 아기 모습이었다. 남편과 함께 장난감 회사 ‘마텔’을 운영하던 핸들러 씨는 딸을 위해 성인 여성의 모습을 한 입체 인형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텔’은 1959년 미국 뉴욕의 장난감 박람회에서 줄무늬 수영복을 입고 하이힐과 링 귀걸이를 착용한 여자 인형을 내놓았다. 딸의 이름인 바버라 양의 애칭을 딴 ‘바비’였다.

가슴이 불룩한 이 인형을 보고 판매상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이 갖고 놀기엔 여성에 대한 신체 묘사가 적나라했기 때문이다. 부모와 상인들은 도덕적으로 위험스러워 보이는 신제품 인형이 시장에서 곧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형의 실제 수요자인 소녀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바비는 ‘그렇게 되고 싶은 미래’였다. 바비는 출시 첫해에만 35만 개가 팔려 나갔다.

요나 젤디스 맥도너 씨가 엮은 책 ‘바비 이야기’에 따르면 섹시한 인형 바비의 출현에는 딸을 가진 한 어머니의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사회적 배경도 반영됐다. 바비가 등장한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보수적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중산층 가정의 화목함이 강조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었고 전업주부의 권태로운 속내가 조금씩 비쳤던 시기이기도 했다. 기존의 성 관념을 지키면서도 사회 참여의 기회를 늘리기 위해 소녀들은 남녀 불평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신 섹시함을 무기로 소비사회를 즐기는 방식을 택했다. 1950년대의 경제 호황이 이런 의식을 뒷받침했다. 1960년대 랜덤하우스 출판사가 출간한 소설 바비 시리즈를 보면 바비는 핑크색 집에 살고 핑크색 스포츠카와 캠핑카, 지프를 갖고 있고 개와 고양이, 말과 판다, 새끼 사자를 키우고 있다.

바비의 직업에 역사와 의식이 반영

바비 인형 자체의 판매액도 어마어마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팔리는 것은 인형 옷과 액세서리다. ‘인형 옷 갈아입히기’는 소녀들의 유희이자 대리만족이어서다. 바비의 패션을 관리하기 위해 디자이너 50여 명, 헤어드레서 10여 명이 투입된다. 바비의 패션 역사에서 크리스티앙 디오르, 샤넬, 캘빈클라인 등 유명 디자이너들이 헌정한 의상도 소녀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즐거워한 것은 ‘직업 체험’이었다. 직업에 따라 다양한 의상을 입은 바비가 나온 것이다.

이 직업의 변천사가 흥미롭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바비는 간호사(1961년) 교사(1965년) 스튜어디스(1973년) 등 여성들에게 많이 권유되는 직업을 가졌다. 1980년대에는 우주조종사(1986년) 의사(1988년) 등으로 직업군이 넓어졌다. 남녀평등의 시대를 감지할 수 있는 변화다. 1990년대 바비는 남성들만의 것으로 여겨졌던 직업에 도전했다. 해병대 장교 바비(1991년) 소방관 바비(1995년) 카레이서 바비(1998년) 등이 나왔다.

시대에 따른 정치·사회의식이 인형 제작에 직접 드러나기도 했다. 1968년 바비의 친구 크리스틴이 태어났다. 흑인 인형이었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인권 운동이 활발했던 때였다. 1991년 바비의 친구로 휠체어를 탄 인형 베키가 나왔을 때 ‘사건’이 일어났다. 베키의 휠체어가 바비의 돌하우스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질 않았다. 마텔사는 베키의 크기를 줄이는 대신 인형 집을 다시 설계했다. 장애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바비 인형이 역사적 사건의 기념물 역할을 맡은 적도 있다. 홍콩 반환 1주년을 맞은 1998년에는 중국 전통 의상 치파오를 입은 중국인 바비가 나왔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에는 한국인 바비도 선보였다.

시선 처리도 바뀌었다. 1959년 제1호 바비 인형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모습이었고 곁눈질하듯 시선을 내려뜨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1967년 바비는 부드러운 웨이브 머리에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것으로 변한다.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표정은 1977년부터다. 각 시대의 지배적인 미의 이상형을 반영한 것이지만 자기주장이 점점 강해지는 여성상의 투영으로도 읽힌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여자아이들의 정신적 지평이나 역할 모델이 쇼핑과 화장 주위만을 맴돌고 있는 인형에 한정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점에선 모두들 한목소리다. ‘바비’라는 말은 백치미인, 유행병 환자, 쇼핑병 환자와 동의어가 돼 버렸다. 금발머리 여자에 얽힌 온갖 농담을 인형으로 만들어놓은 형상이라는 것이다.”(페트라 레스키 ‘20세기 여인들: 성상, 우상, 신화’에서)

바비는 명성만큼이나 숱한 비난을 받아왔다. 여자아이들이 바비를 사달라고 조르는 이유는 바비를 닮고 싶어서이지만 바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닮지 말아야 할’ 대상이라고 지적한다.

일단 괴상한 몸매가 그렇다. 사람으로 치면 ‘36-18-33’(가슴-허리-엉덩이)인데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다면 외계인으로 여겨질 것이다. 머리둘레는 22인치로 미국 여성 평균보다 2인치 더 크지만 목은 2배 길고 6인치 더 가늘다. 실제 사람은 이런 수치로는 머리를 지탱할 수 없다고 한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이 외모를 소녀들이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면서 섭식장애 같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게 일상적인 논란 중 하나다.

1992년 ‘말하는 바비’ 사건의 여파도 컸다. 마텔사는 여성들이 흔히 쓰는 말로 여겨지는 표현을 바비가 말하도록 설계했다. ‘나는 쇼핑을 좋아해(I love shopping)’ ‘원 없이 옷을 입어볼 수 있을까(Will we ever have enough clothes)’ ‘수학 시간은 힘들어(Math class is tough)’ 등의 표현이 논란이 됐다. 과소비를 조장하거나 여성은 수학을 못한다는 편견을 심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탄생 40년을 맞은 1999년 이후 바비는 이미지 전환에 나선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Be Anything)’는 메시지를 앞세우면서 수동적인 미녀에서 벗어난다. 대통령(2000년)이나 컴퓨터 엔지니어(2010년) 등의 직업을 거쳐 최근에는 바쁘게 일하는 전문직 여성의 모습을 한 ‘커리어 우먼 바비’에 이르게 됐다. 몸매는 여전히 괴상하지만 2000년대 여성상에 맞춰 진화해왔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는 바비의 변신에 대해 “하나의 제품을 문화적인 상징으로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고 평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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