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박현진]선진국의 진정한 조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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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뉴욕 특파원
박현진 뉴욕 특파원
9·11테러로 폐허가 됐던 미국 뉴욕 맨해튼 옛 세계무역센터 자리의 ‘그라운드제로’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 21일 추모박물관이 개장한 데 이어 옆 건물인 102층 프리덤타워(WTC1)가 막바지 내부공사를 진행 중이다. 미국에서 가장 높은 프리덤타워 공사에는 작업인력 1만여 명이 투입됐고 자동차 2만2500대에 맞먹는 철근 4만8000t이 들어갔다. 추모박물관 공사에도 매머드급 자재가 들어갔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는 고난도의 건설 현장이지만 10년 가까운 공사에서 한 건의 안전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미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는 현대·기아차 국내 협력업체들의 생산공장이 대거 진출해 있다. 몇 년 전 이곳에서 한 공장이 상당 기간 문을 닫아야 했다. 미 노동부 산하 연방작업안전보건행정국(OSHA)이 규정한 산업용 장갑 안전기준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 기관은 작업 현장의 위험도에 따라 절단 등에 견딜 수 있는 작업용 장갑의 내구성을 5등급으로 분류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영업정지를 맞게 된다. 한 부품협력업체 대표는 “한국에서도 비슷한 안전기준이 있지만 이를 준수하느냐는 천양지차”라고 말했다. 사소해 보일지 모르는 작업용 장갑의 안전기준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국에서 공장 문을 닫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미국에서는 안전기준을 어겼을 때 패가망신 수준의 가혹한 철퇴를 가한다.

한 주재원은 최근 황당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아파트에서 화재 경보음이 울려 비상계단을 통해 힘겹게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원인은 화재가 아니라 경보장치의 오작동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같은 이유로 하루에만 세 차례나 비상계단을 오르내리는 곤욕을 치렀다. 출동한 소방관과 아파트 관리 직원에게 “오작동인 것을 알면서 왜 세 번씩이나 대피를 시키느냐”고 항의했다. 경보음이 울리면 대피하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처벌과 벌금을 물게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더 놀라웠던 것은 항의를 한 사람은 자신뿐이었으며 현지 미국인들은 별다른 내색 없이 묵묵히 대피 지시를 따랐다는 점이다. 이는 13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트레이드타워와 아셈타워에서 실시된 화재 대피 훈련에서 25%만 참여했다는 사실과 대조되는 장면이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는 어릴 때부터 교육과 훈련으로 체화된 안전의식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미 학교에서 예고 없이 수시로 실시되는 각종 안전훈련에 한국에서 온 학생들은 처음에는 당황하고 짜증스러워하지만 곧 적응한다. 물어보면 “재난훈련은 그냥 일상”이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2020년이 오기 전에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 경제대국에 올라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때 일부 전문가는 반론을 제기한다. 사회적인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선두에 오를 수 없다는 얘기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실러 미 예일대 교수는 3월 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더이상 중진국이 아닌 경제 선진국”이라고 강조했다.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세계 15위라는 이유에서였다. 세월호 참사가 터진 이후에도 한국이 여전히 그런 평가를 받을지는 의문이다. 뉴욕타임스는 19일자 사설에서 세월호 사고와 관련해 “부(富)를 좇는 과정에서 한국이 안전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다른 병폐에도 눈을 감았다. 국가적인 자기성찰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성찰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가 진짜 선진국이냐 아니냐의 갈림길이 될 것 같다.

박현진 뉴욕 특파원 witness@donga.com
#9·11테러#그라운드제로#안전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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