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잡대 나온 ××가…” 과장 한마디에 회사는 지옥이 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5일 03시 00분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1부>나는 동네북이 아닙니다
도 넘은 직장내 언어폭력

“지잡대 나온 XX가…”
“지잡대 나온 XX가…”
“야!” 컴퓨터 모니터 한쪽에 메신저 창이 떠오른다. “네, 과장님” 키보드를 치는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한다. “이리로 와봐.” 앞에 서기도 전에 과장이 고함부터 지른다. “너, 이거 왜 재무팀엔 보고 안 했어? 누구 잘리는 꼴 보고 싶어?” “저번에 웬만하면 과장님께만 직속 보고하라고(하셨는데요)….” 설명이 화근이 됐다. “그걸 말이라고 해, 지금?” 과장이 들고 있던 서류를 눈앞에서 흔들어댄다. 종잇장이 금방이라도 얼굴을 스칠 것만 같다. 손이 심하게 떨려 한 손으로 다른 손을 눌러 잡는다.

○ 나를 병들게 한 상사

지난해 팀을 옮긴 이후 회사는 ‘지옥’이 됐다. 전 팀에선 ‘일 잘하는 막내’라는 평가를 받았다. 새로 옮긴 팀 과장은 직원들에게 막말을 퍼붓는 걸로 유명했다. 업무에 미처 적응 못한 막내는 곧바로 표적이 됐다. 작은 실수에도 “왜 하필 저런 ××가 들어와서” “아, 왜 그걸 못해”라는 핀잔이 날아왔다. 처음엔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다. 오후 7시쯤이던 퇴근 시간도 오후 9∼10시로 늦췄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날 말대답을 했다가 동료들 앞에서 “어디서 지잡대(지방 대학을 낮춰 부르는 말) 나온 ××가…”라는 말을 들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그때쯤이었다. 손떨림과 불면증이 시작된 것은.

서울의 한 대기업 영업 부서에서 일하는 전모 씨(29)가 털어놓은 내용이다. 그는 지난해 9월부터 정신건강의학과 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 하루 한 알씩 항우울제도 먹는다. 전 씨는 “언젠가부터 ‘일을 잘해서 칭찬을 받겠다’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욕을 안 먹고 끝낼까’라는 생각이 앞섰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직장인 20명에게 △상사의 막말을 듣는 빈도 △가장 상처가 된 상사의 말 △최소한 하지 말아야 할 말 △상사의 막말로 인해 겪게 된 증상을 들어봤다. 욕설이나 면박, 비꼬기 등 폭언을 ‘하루 한두 번은 듣는다’는 응답이 6명으로 가장 많았다. 2명은 매일 수없이 듣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 중 심장 두근거림, 불면증, 손떨림 등 신체적인 증상을 호소하는 이는 4명이었다. 다른 응답자들도 “웃고 떠들다가도 상사를 보면 무표정이 된다” “입술을 꽉 깨문다” “휴대전화 소리에 깜짝깜짝 놀란다” 등의 변화를 호소했다. 2012년 연세대 원주의대 예방의학과 장세진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직장 내 폭력 유형 중 언어폭력은 55.5%를 차지했다. 전체 응답자 중 “언어폭력 경험이 있다”고 답한 직장인은 2010년 3.7%에서 2011년 4.9%로 늘었다.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언어폭력 피해 직장인 중에는 ‘외상후울분장애(PTED·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며 “좌절과 굴욕감에서 시작돼 심한 경우 신체적 통증을 유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 사무실 안 숨죽이는 여직원

성희롱과 외모 관련 막말의 주된 표적은 여직원이다. 대기업 기획부서에서 일하는 최모 씨(30)는 ‘모텔’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진저리가 난다. 같은 팀 40대 과장은 기회만 있으면 “주말에 남자친구랑 뭐했어?”라고 묻는다. “영화 봤어요”라고 하면 “왜, 요새 모텔 시원하고 좋은데 그런 데나 가서 누워 있지”라며 능글맞게 웃는다. 좀 더 연차가 적은 여직원에겐 “○○ 씨는 남자친구랑 여관 같은 데 안 가나?”라고 묻기도 했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웃는 상사가 싫어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지만 속에선 울화가 치민다.

중소기업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김모 씨(27)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회사에 다녔다. 같은 팀 남자 상사는 “입술(립스틱)이라도 좀 바르고 다니지?” “○○ 씨는 다리가 날씬해서 치마가 예쁠 것 같은데” 등 김 씨의 옷차림을 지적했다. 김 씨는 “기분이 나빠도 막상 대들었을 때 상사가 부인하면 끝이다”며 “오히려 고발하는 여직원들을 보고 ‘별나다’는 둥 뒷말을 하는 경우가 많아 속을 털어놓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민우회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노동상담실의 총 상담 건수 394건 중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은 222건으로 56.35%를 차지했다. 한국여성민우회 이소희 활동가는 “이런 발언들은 여직원들을 동등한 자격으로 입사한 동료라기보다 한 명의 여성으로만 바라보는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모진수 인턴기자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직장 언어폭력#성희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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