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OK, 세금은 싫다”는 표심… 전세계 정치권의 딜레마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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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세의 정치학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선거를 앞둔 정치인에게 증세(增稅)는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금기어다. 유권자들은 선거 때 복지 등의 분야에서 더 많은 혜택을 정치권에 요구하지만 이를 위해 자기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걸 아는 순간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복지 공약=득표’지만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실상 동전의 양면인 증세 공약은 곧 ‘감표’라는 인식이 강하다.

특히 부가가치세의 신설이나 증세는 세계 각국 정권의 운명을 여러 차례 갈랐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예고했던 1979년 10월 부마(釜馬)항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1977년 도입된 부가세가 꼽힌다. 당시 시위 군중들이 든 피켓에는 ‘부가가치세 철폐하라’ 등 부가세 관련 구호가 적지 않았다.

일본의 역대 정권도 ‘소비세’로 인해 사활이 갈렸다. 1997년 일본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는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올렸다가 이듬해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했다.

2010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승세를 굳혔던 민주당은 재정건전화를 위해 소비세를 5%에서 10%로 올리겠다는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의 말 한마디에 민심이 돌아서 참패했다. 결국 일본은 글로벌 재정위기 속에서 신용등급 강등을 겪은 뒤 올해 8월에 소비세율을 현행 5%에서 단계적으로 10%까지 올리는 법을 간신히 통과시켰다. 일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는 간신히 총리직은 유지했지만 이 과정에서 증세에 반대하는 같은 당(민주당) 의원들이 집단 탈당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1993년 브라이언 멀로니 캐나다 총리 역시 부가세를 전면 실시했다가 여론 악화로 물러난 바 있다.

부가세뿐 아니라 각종 세금의 신설이나 증세는 정치적 역풍을 부른다. 노무현 정부는 종합부동산세 신설, 양도세 강화 등의 정책 때문에 ‘세금 폭탄’이라는 공격을 받으며 지지율이 급락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7월 출마 선언 때 “복지 수준과 조세 부담에 대한 국민대타협을 추진하겠다”고 언급했지만 이후 “대타협이 꼭 증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발 물러선 것에서도 이런 고민이 묻어난다.

“소득 수준에 따라 능력대로 세금을 더 내야 한다”며 ‘보편적 증세론’을 주장했던 안철수 후보도 최근 “조세 정의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서민층이 증세의 결과를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문재인 후보와 민주통합당은 줄곧 ‘부자 증세’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의 복지 확대 공약(19대 총선)을 전부 이행하려면 새누리당은 75조 원, 민주통합당은 165조 원의 예산을 추가로 써야 한다. 부가세, 소득세, 법인세 등 주요 세목을 건드리지 않고는 도저히 확보할 수 없는 규모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17일 “정치인들이 다른 곳에 쓸 재원을 줄여서 복지를 늘리겠다고 말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현재 한국은 저부담 저복지 구조”라며 “국민이 더 많은 복지를 원한다면 조세 부담 증가도 함께 논의돼야 하고 대선을 통해 증세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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