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비극의 축소판’ 박인숙 씨의 굴곡진 삶]“월남쟁이 딸 손가락질… 郡 1등에게 돌아온건 불합격”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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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 이후… 형극의 삶

아버지와 헤어진 후 박인숙 씨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졌다. 월남자의 딸은 아무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인민학교 5학년 때 군(郡) 수학 올림픽에서 1등을 하였지만 약속된 상품은 나오지 않았다. ‘월남쟁이’ 딸이 1등을 해 떠들썩한 게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 다음 날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쟤는 아무리 잘해도 쓸데없다’라고.”

“1957년 인민학교를 졸업하면서 최승희무용학교 음악과에 추천받았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보고 싶은 아버지였건만 나에게는 아버지란 존재가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내 맘대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어머니에게 왜 아버지를 붙잡지 못하고 잃어버렸느냐고 철없이 엉엉 울었다.”

그런 박 씨에게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너는 알아야 한다. 남이 한 발자국 걸어갈 때 너는 열 발자국 뛰어야 한다는 것을….”

“(중학교) 졸업식 날. 최우등생 호명과 상장 수여식이 있었다. 수상자 3명 중 나는 없었다. 나는 8학년까지 한 번도 최우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성분이 나쁘다고 억지로 빼놨던 것이다. 눈물이 났다. 눈물이 안 나는데 엉엉 운 적은 많았어도 눈물이 나는데 울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반동일지라도 (내가) 최우등이야. 그렇지 않은가.”

“이사할 때 아이들이 기차를 따라오며 소리쳤다. ‘잘 가라. 다시 만나자. 인차(곧) 오너라.’ 며칠 뒤 ○○이가 왔다. 그날 밤 일로 학교 민청총회에서 두들겨 맞았다는 것이다. 열아홉 살까지 한마을에서 살던 죽마고우와 헤어지며 우는 것도 반당적 행위라니….”

“졸업생 3분의 1이 대학에 갔지만 나는 1인자였어도 추천을 못 받았다. 어머니 몰래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는 마치 자기가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를 살피곤 하였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박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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