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제로금리 2년 유지”]“美 경제 잃어버린 5년 자기고백… 긴 터널이 시작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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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 10人의 진단

‘긴박한 금융위기가 올 가능성은 낮아졌지만 앞으로 선진국은 물론이고 한국 경제도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가야 한다.’

국내 경제 전문가들은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해법에 대해 현 시점에서 불가피하다고 수긍하면서도 향후 세계 경제에 대해서는 대부분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은 일정 부분 해소됐지만 적어도 4, 5년간은 전 세계가 저성장 국면에 빠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들은 “한국은 수출 부진과 소비 둔화로 성장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재정건전성 강화에 사력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세계 경제에 드리울 가장 큰 리스크로는 유럽 재정문제를 꼽았다.

동아일보는 10일 국내 주요 연구기관과 금융회사 이코노미스트, 학계 전문가 10명을 긴급 설문조사했다. 이들은 버냉키 의장의 결정이 급한 불을 끄는 데는 효과가 있지만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 미국발 ‘잃어버린 5년’ 진행되나

전문가들은 버냉키 의장의 제로금리 유지 결정이 경제가 나쁘다는 미국 스스로의 ‘자기 고백’이라고 말했다. 오석태 SC제일은행 이코노미스트(상무)는 “2013년까지는 미국 경제가 어려울 것이라고 인정한 셈”이라며 “결국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나타난 ‘잃어버린 5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세계 경제는 상당 기간 저성장 기조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이 경상수지 적자, 부동산 거품 붕괴 등 문제를 ‘리먼 사태’ 이후 안정적으로 관리했지만 결국 재정적자 부분에서 문제가 터졌다”며 “재정 문제는 저성장 국면을 낳았고 이는 미국 경제의 구조조정이 끝날 때까지 향후 4, 5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국내경제팀장은 “소프트패치(경기회복 후 일시적 침체)냐 더블딥(경기회복 후 재침체)이냐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지금까지는 7 대 3으로 갈렸다면 이제는 5 대 5 정도로 더블딥에 무게가 실린다”며 “미국이 정말 더블딥으로 들어간다면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의회와 합의한 재정적자 감축 프로그램이 세계 경제에 부담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미국 정부가 돈을 뿌릴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고, 당장 10년간 2조 달러 이상의 정부 재정을 감축해야 하는 만큼 정부가 오히려 시장의 리스크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세계 경제 성장세도 처지고 금융시장도 비실비실한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이다.

○ 최대 리스크는 유럽 재정위기

전문가 10명 중 7명은 향후 세계 경제의 가장 큰 리스크로 유럽의 재정문제를 꼽았다. 이어 미국의 더블딥 우려 등이었다. 신 실장은 “그리스, 포르투갈 등 작은 나라들은 유럽중앙은행이 돈을 빌려줘서 부도 위기를 막아내고 있는데 이탈리아, 스페인 등 경제규모가 큰 나라는 그런 접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박원암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도 “제일 큰 리스크는 유럽 리스크”라며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상황이 어디로 갈지 예측할 수 없고 국제 공조도 지금으로서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번 금융시장 패닉에서 볼 수 있듯 아무리 미국이 신용등급 강등 사태를 맞았다 해도 달러화와 미국 국채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여전하지만 유럽은 그렇게 ‘비빌 언덕’이 없다는 것이다. 김학균 대우증권 투자전략팀장은 “독일 같은 나라가 유럽 재정 안정에 흔쾌히 힘을 보태 유로존 시스템 안정에 대한 시장의 기대를 높여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진단했다.

미국과 유럽 모두 실물 측면에서는 예상보다 악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신석하 KDI 경제동향연구팀장은 “리먼 사태 때와 달리 이번 신용등급 강등 사태는 그 자체로 실물 경기에 직접 영향을 미칠 만한 경로가 크지 않다”며 “의외로 불안이 빨리 진정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이동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거시팀장은 “미국, 유럽에 대한 나쁜 소식이 나올 때마다 금융시장이 요동칠 것”이라면서도 “세계 경제가 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속단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 “외환시장 안정이 가장 중요”


세계 경제 침체는 한국의 수출 둔화와 외환시장 불안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이준협 팀장은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외환시장의 불안요인을 없애는 것”이라며 “외환시장 불안을 잡지 않으면 증시는 물론이고 국가 전체가 어려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선제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원암 교수는 “금융시장 안정 기조를 다지는 데 정부만 역할이 있는 게 아니다. 은행, 증권사, 투자자, 기업 모두 상황을 인식하고 본격적인 위험 관리에 들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 경제의 체력을 튼튼히 하기 위해 외환정책과 금리정책에서 정부가 ‘안정’보다는 ‘성장’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는 환율을 높게, 안정적으로 가져가는 게 가장 큰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수출의존형 경제구조인 우리나라는 결국 이런 대외 리스크에 버티기 위해서는 경상수지 흑자가 중요하고, 이를 위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환율을 조금은 높게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명활 금융연구원 거시금융연구부장은 “국제유가나 상품가격이 떨어지는 만큼 지금은 우리 통화정책도 물가보다는 금융시장이나 경기 안정을 감안해야 할 때”라며 “금리는 더 올릴 상황이 아니고 나중에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 다시 내릴 필요도 있다”고 진단했다.

가계부채와 재정건전성 관리에 대한 주문도 빠지지 않았다. 오석태 이코노미스트는 “수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내수를 늘려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 급한 불은 가계부채 문제”라며 “선진국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지금은 이미 늘어난 가계부채를 관리해 펀더멘털을 튼튼히 해야 할 때”라고 했다. 신석하 팀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 재정확장 정책을 이미 쓴 만큼 지금 다시 재정지출을 늘릴 순 없다”면서도 “다만 성장둔화가 현실로 나타나면 한계계층을 배려하는 재정정책을 일부 고려하긴 해야 한다”고 밝혔다. 강석훈 교수는 “금융시장이 개방된 상황에서 통화정책은 별 의미가 없다”며 “재정정책이 우리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므로 이 부분의 건전성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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