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뮤직]“이제는 한국産 명품 수제기타가 나와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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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8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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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코리아 전 지사장 '에피폰 킴' 김동진 씨의 악기 인생
●"오랜만에 찾아온 통기타 붐, 반갑고도 설렌다…"

뮤즈기타를 이끄는 막내 아들인 김진혁 대표와 포즈를 취한 김동진 전 깁슨코리아 지사장. 아버지와 세 아들이 모두 기타산업에 근무하는 기타가족이다.
뮤즈기타를 이끄는 막내 아들인 김진혁 대표와 포즈를 취한 김동진 전 깁슨코리아 지사장. 아버지와 세 아들이 모두 기타산업에 근무하는 기타가족이다.
서울시 금천구 독산동에 위치한 '뮤즈기타'는 서울 시내에 몇 안 되는 수제기타 공방 가운데 하나다. 공방을 운영중인 김동진(60) 전 깁슨코리아 지사장은 찾아온 기자를 먼저 지하 제작실로 안내했다.

자그마한 공간이었지만 나무 보관에서부터 정교한 기타의 주요 부품을 독립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고가의 기계장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오랜 기간 국내 메이저 기타제조사에서 실무를 책임진 고급기술자들이 다수 일하고 있었다. 한달에 불과 20~30개를 생산할 뿐인 이 기타는 100만원~150만원의 중고가 시장을 겨냥한다고 했다.

- 한국에서는 기타 제조 공장이 크게 줄었지요?

"그렇습니다. 2000년을 기점으로 제조 공장이 거의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지로 이동했어요. 혹시 우리나라가 세계 최대 기타 제조공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 아니요. 몰랐습니다. 우리가 악기제조도 했나요?

"허허…물론이죠. 전성기에는 파주의 세고비아, 인천 부평의 삼익 영창 콜트악기, 의정부 성음악기가 대활약을 했어요. 한동안 전 세계 생산량의 30% 이상 40% 가까이 차지했을 정도니까요. 물론 아쉽게도 우리브랜드가 아닌 펜더, 깁슨(에피폰), 마틴 등 외국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잘 몰랐을 뿐이에요. 한동안 우리가 악기 강국이었는데 지금은 제조가 힘을 잃어서 아쉬워요."

■한때 한국이 전 세계 기타의 40%를 책임져…

김동진 전 지사장은 1992년부터 2007년까지 15년간 세계적인 기타브랜드인 깁슨(Gibson)에서 깁슨 코리아 한국 지사장 및 기술실장으로 일하며 한국 기타산업의 흥망성쇠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 가운데 하나다.

명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한 대기업 전자업체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는 1986년 콜트악기로 이직하면서 당시 각광받던 전자악기(신디사이저 일렉트릭 기타 등)산업에 뛰어들게 됐다. 그리고 자신이 개발한 이퀄라이저 기술특허로 미국 깁슨사로 스카웃 돼 한동안 전 세계 기타 제조 산업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 1990년대에는 어느 정도나 수출하신건가요?

"저 혼자서만 한 달에 5만대씩 만들어 수출했어요. 에피폰(ephipone)이라는 깁슨의 하위 브랜드를 주로 주문 생산했지요. 그래서 제 별명이 '에피폰 킴'이 됐어요. 당시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르기 전이라서 우리나라가 기타 생산의 중심지로 각광받던 시점이었어요."

-기타 소비는 어디에서 이뤄지나요?

"압도적으로 미국이에요. 미국의 일반 가정에도 전자기타가 10여대씩 있을 정도로 기타를 아끼고 수집하는 문화가 보편화됐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이 전 세계 브랜드 기타 소비의 절반(50%)을 차지하고, 일본이 20% 영국 10%, 그리고 나머지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브라질 태국 등이 나눠가지는 형국이지요. 그리고 저 순서대로 음악 강국 순위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통기타 치는 아이돌 가수, 뮤지션을 꿈꾸는 일반인들이 나오는 오디션 프로그램, 7080 포크 음악 부활 등으로 최근 기타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있다(종로구 제공)
통기타 치는 아이돌 가수, 뮤지션을 꿈꾸는 일반인들이 나오는 오디션 프로그램, 7080 포크 음악 부활 등으로 최근 기타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있다(종로구 제공)

-우리나라의 기타 수요는 어느정도인가요?

"1980년이 절정이었지요. 송창식 윤형주가 활동하던 70~80시절에는 월 3만대가 팔렸어요. 1990년대는 통기타 붐이 꺼졌지만 다행이 교회음악을 중심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최근에 '세시봉' '인디 밴드' 열풍이다 해서 월 2만대 수준으로 회복된 상태에요. 그래도 예전만 못하죠. 허허…"

-지금 우리가 쓰는 것은 대부분 중국 산이겠죠?

"그럼요. 한국의 인건비도 비싸졌고 헝그리 정신이 없고요. 현재 우리나라 1만5000대 정도 생산할지 모르겠어요. 전 세계 한달에 100만대 정도라고 잡으면 1.5% 생산이겠네요. 중국에서는 40만대 정도 만들고 있을까요? 이제는 자연스럽게 수제 고급기타 산업으로 넘어가는 단계입니다."

■음악이란 가장 보수적인 산업…브랜드가 절대중요

-우리가 OEM을 주로 제조했다지만 국산인 '세고비아'란 브랜드도 유명했는데…

"그것도 안타까운 역사가 잇습니다. '세고비아'가 국내 대표 기타브랜드였는데요 스페인 세고비아 집안과 로열티 분쟁이 있어서 결국 수출용에는 그 명칭을 쓰지 못했어요. 결국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브랜드 기타를 만드는 데 실패한거죠."

-악기에서 브랜드 위상이 절대적인가요?

"악기란 처음 만들어진 것에서 크게 형태가 바뀌지 않아요. 1800년대에 형태가 잡힌 기타 역시 마찬가지에요. 무엇보다 음악의 속성 자체가 전통을 중시합니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아무리 완벽하게 기타를 만들어도 전 세계에서 알아주질 않는 거지요. 그 점을 빨리 깨우치지 못한 점이 아쉽지요."

-실제 제조 품질은 어떤가요?

"기타 제조란 나무와의 싸움이에요. 적어도 나무를 3년 정도는 건조시켜야 하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누가 그 비싼 나무를 3년이나 안 팔고 쌓아놓을 수 있겠어요. 나무 사오면 강제 건조시켜서 재빨리 제조해 파는데 급급했거든요. 그런데 미국은 그게 가능했으니 고가품을 주로 만들었고, 우리는 저가품에 집중한거죠. 그런 차이로 우리는 세계적 브랜드를 갖지 못한 겁니다."

돌이켜보면 1997년을 전후로 한 IMF시대가 한국 악기산업의 전성기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수출을 위주로 하는 국내 악기산업이 달러 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큰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호황도 잠시 한국은 급격한 인건비 상승으로 힘들어했고 자연스레 제조산업의 중심축은 급격하게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내 대표 악기제조업체들도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며 국내 악기제조의 전통은 희미해지고 만다.
세시봉 바람타고 수제품 주문 밀려 들어와요 한국 기타 산업의 산증인인 김동진 전 깁슨코리아 지사장은 "이제야 제대로 된 국산 악기브랜드를 키워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말한다.
세시봉 바람타고 수제품 주문 밀려 들어와요 한국 기타 산업의 산증인인 김동진 전 깁슨코리아 지사장은 "이제야 제대로 된 국산 악기브랜드를 키워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말한다.

■깁슨(Gibson)에서의 15년, 온 가족이 깁슨 가족

깁슨은 1902년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타제조업체 가운데 하나다. 미국 테네시 주에 본거를 두고 있는 이 기타업체는 비비킹 지미 헨드릭스 등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와 함께 성장하며 '현대 대중음악'을 건설한 주역으로 손꼽힌다.

그런 전통적 악기제조업체가 제조공장을 아시아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제조기술과 김동진 씨 같은 기술자 겸 관리자가 필요했던 셈이다.

-깁슨에서의 활동은 만족하시나요?

"물론이죠. 당시 미국도 세계시장으로 확대하던 때라 제 역할이 무척이나 중요했어요. 중거자 생산기지 역할에서부터 중국공장 설립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을 담당했지요. 미국에서도 한국과 제 역할에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했어요."

-테니지주 내쉬빌은 어떤 동네인가요?

"1990년대에는 테네시에 한국 식당이 한개 있었을 때에요. 그 이전가지 내쉬빌은 성경책 등을 인쇄하는 출판도시로 유명했고, 1980년대 이후에는 기타 제조로 명성을 떨쳤어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산업화하면서 처음에는 인쇄를 이후에는 기타 제조까지 모두 뺏어온 거지요."

김 지사장의 활약이 이어지면서 그의 가족 전체가 기타 집안으로 변신했다. 첫째는 미국 깁슨 본사에서 마케팅 담당자로 일하고 둘째는 중국의 청도 공장 책임자로 일하며. 그리고 막내는 아버지와 함께 독자적인 뮤즈기타를 운영하며 독자 브랜드를 시험 중인 것이다.

"2007년 3월에 깁슨을 완전히 관뒀어요. 퇴직금 등으로 받은 돈으로 수제기타 브랜드인 뮤즈기타를 차린 셈이죠. 그 때만 해도 수제 기타의 미래가 불투명 했는데 다행이도 세시봉 같은 통기타 붐이 다시 찾아와서 주문량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습니다."
여전히 통기타 판매는 전자기타보다 4배 이상 많다. 순수한 악기의 매력에 사람들이 매료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통기타 판매는 전자기타보다 4배 이상 많다. 순수한 악기의 매력에 사람들이 매료되기 때문이다.

-통기타 판매가 전자기타보다 잘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단 전자기타를 치려면 앰프와 스피커가 있어야 하니 복잡하죠. 그런데 그것보다 기타를 사주는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날라리, 딴따라가 치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서 그런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통기타는 거부감이 조금은 적은 편이죠. 또한 악기의 역사를 돌아보면 결국은 순수한 악기가 생명력이 길더군요. 통기타는 순수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악기의 왕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휴대하기 편하고 다양한 효과를 줄 수 있는 악기는 찾기 힘들어요."

-기타 산업에만 30년 종사하면서 아쉬운 점은 어떤 점인가요?

"음악을 바라보는 시각이겠죠.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기타를 만지길 꺼리는 문화가 있어요. 그러다보니 음악문화가 양성화 되지를 못하는 거죠. 70-80통기타 붐이 5공화국 이후 정치탄압으로 사라졌는데 아직도 완벽하게 부활한 것 같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기타를 팔면서 꼭 만나는 광경이 기타를 자식들에게 사러 와서는 '너 공부 못하면 기타를 뺏을 거야'라는 표현이에요. 물론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기타보다는 공부가 훨씬 중요하죠. 그러나 아이의 인생에서 음악을 이제는 빼놓을 수 없는 시대가 됐어요."

-마지막으로 고급 수제 기타가 한국에서도 가능성이 있을까요?

"아직은 가격 경쟁력 덕분이긴 해요. 해외의 유명 수제기타(마틴 산타크루즈 라우덴 등)는 500만원을 훌쩍 넘는데 비슷한 품질의 국산 브랜드라면 3개 살 가격이거든요. 이제는 확신이 들어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국산기타를 원하고 있어요. 음악이 발전하려면 악기제조도 강해져야 합니다. 제조가 되어야 수리도 가능하거든요. 이제는 한국 산(産) 명품 수제기타가 나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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