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 4차원 코믹 뮤지컬 ‘스팸어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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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14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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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라스베가스처럼 묘사되는 아서왕의 전설의 성 캐멀럿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원탁의 기사들.
사진 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미국의 라스베가스처럼 묘사되는 아서왕의 전설의 성 캐멀럿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원탁의 기사들. 사진 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요즘 볼만한 뮤지컬 뭐 있어요. 요즘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전 '스팸어랏'을 추천합니다. 상대가 뮤지컬 마니아면 "스팸어랏에 몇 편의 뮤지컬이 등장하는지 한번 세어보라"고 은근히 호승심을 부추깁니다. 상대적으로 뮤지컬을 많이 접하지 않는 분이라면 "공연보기 전에 사전정보를 입수하고 무장 해제된 마음으로 작품을 즐기라"고 권합니다. 단 모름지기 뮤지컬이란 마음을 정화시키는 감동이 필요하다고 믿는 근엄한 분들에겐 절대 관람포기를 권유합니다.

몇 년 전 젊은 나이에 논설위원이 되신 한 선배께서 한번은 정색하고 "난 왜 사람들이 '개그콘서트'를 보고 웃는지 모르겠다"며 그 이유를 물어보신 적이 있습니다. 음, 이런 분들에겐 이 뮤지컬, 시간낭비, 돈 낭비입니다. 영화 '슈렉'이나 '쿵후 팬더'를 우연히 보고도 배꼽 잡고 웃으신 분들, 일본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란마 1/2'을 보고 첫눈에 반하신 분들, 이런 분들이 아니라면 이 뮤지컬을 즐기기 위해선 약간의 예습이 필요합니다.

뮤지컬 한편 보는데 뭘 예습까지 하느냐 하는 분들도 충분히 계실 겁니다. 저도 그런 분들을 감안해 이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정보가 없는 공연계 친구와 이 뮤지컬을 같이 관람해봤습니다. 그 친구 1막이 끝날 때까지 "어 이거 뭐야, 뭐 이런 뮤지컬이 다 있어"하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2막이 시작되자 비로소 이 뮤지컬의 웃음코드를 이해하고 박장대소를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제 서야 비로소 "어 이런 거였어. 이거 정말 웃기네"라는 말이 터져 나오더군요.

예습이라고 해봤자 별거 아닙니다. 3가지 정도만 알면 됩니다. 이 작품의 원작이 '몬티 파이톤과 성배'(1975)라는 코미디 영화라는 거, 영국에서 '아더왕의 전설'이 한국으로 치면 주몽설화쯤 되는 성스럽고 거룩한 민족설화라는 거 그리고 2005년 제작돼 토니상 뮤지컬 작품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한 이 작품이 정작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실컷 해체하고 조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는 만큼 웃을 수 있는 코믹 뮤지컬 '스팸어랏'.
사진 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아는 만큼 웃을 수 있는 코믹 뮤지컬 '스팸어랏'. 사진 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몬티 파이톤은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영국 캠브리지대와 옥스퍼드대 출신을 주축으로 한 6명의 코미디 작가 겸 배우들이 결성한 코미디 그룹의 이름입니다. 이들은 1969~1974년 BBC에서 방영한 '몬티 파이톤의 플라잉 서커스'란 TV프로로 영미권 코미디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주역들입니다. 이들의 코미디가 영국을 넘어서 미국을 강타한 현상을 두고 '코미디계의 비틀즈'란 비유가 나왔고 파이토니스크(pythonesque)라는 단어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니까요. 미국 공영방송인 PBS의 최고 시청률 기록을 아직도 이들의 코미디프로가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웃음코드는 전통적 유머와 아이러니와 전혀 달랐습니다. 비논리적 상황 전개와 이질적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초현실적이고 4차원적 웃음을 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실상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를 뒤집어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논리적 사고만 중시하는 사람에겐 완벽한 넌센스지만 직관적 이해력이 빠른 사람들에겐 웃음폭탄이 따로 없었습니다. 코미디에 '의식의 흐름'을 도입했다는 평가까지 나온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의 코미디언 심형래 씨가 TV프로그램으로 인기를 얻은 뒤 그 여세를 몰아 여러 편의 코미디영화를 제작했듯이 이들도 TV코미디가 성공한 뒤 몇 편의 영화를 공동 제작했습니다.
가장 성공한 영화가 아서왕의 전설을 패러디한 '몬티 파이톤과 성배'였습니다. 영국의 국민적 설화인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신성모독에 가까울 정도로 패러디한 이 영화는 컬트영화의 반열에 올랐고 공동감독을 맡은 테리 길리엄(유일한 미국인)은 칸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을 만큼 영화계 거장이 됐습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패러디한 장면. 원탁의 기사가 된 순수한 갤러허드(예성)와 신비한 호수의 여인(신영숙)이 "이쯤 되면 꼭 나오는 노래/서로 마주 보며 오버하는 노래"라는 촌철살인의 가사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꼭 등장하는 러브테마곡을 풍자한다.
사진 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패러디한 장면. 원탁의 기사가 된 순수한 갤러허드(예성)와 신비한 호수의 여인(신영숙)이 "이쯤 되면 꼭 나오는 노래/서로 마주 보며 오버하는 노래"라는 촌철살인의 가사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꼭 등장하는 러브테마곡을 풍자한다. 사진 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뮤지컬 '스팸어랏'은 바로 이 영화를 토대로 제작된 뮤지컬입니다. 당시 영화의 대본작성에 참여했고 원탁의 기사 중에서 겁쟁이 로빈 경으로도 출연했던 에릭 아이들이 대본과 작곡을 맡았습니다. 뮤지컬 내용 중 70%가량은 영화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불경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서왕(박영규/정성화)과 원탁의 기사들은 기마자세로 뛰어다니면 시종들이 코코넛 열매로 '따가닥 따가닥'하는 말발굽 소리를 내주는 유치한 어린이처럼 그려집니다. 게다가 아서왕은 후대의 명성만 쫓는 멍청한 속물이고 원탁의 기사를 대표하는 랜슬럿 경(정상훈)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학살하는 살인마로 그려집니다. 뮤지컬은 한발 더 나아가 아서왕의 아내 기네비어 왕비와 불륜으로 유명한 랜슬럿 경을 동성애자로 그립니다. 아서왕과 대결을 펼치는, 사지가 모두 잘려도 끝까지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르는 흑기사는 기사도정신 뒤에 깔린 호전성과 야만성에 대한 풍자입니다.

영화와 차이점은 원탁의 기사들이 수행해야하는 미션 중에 브로드웨이 뮤지컬 제작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브로드웨이는 먼 미래에 생기는 도시 이름 아니요?"라는 아서왕의 반문 따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은 성배를 찾아 나선 미션을 수행하는 도중에 '오페라의 유령', '프로듀서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등 온갖 브로드웨이 명작 뮤지컬을 인정사정없이 해체해버리고 그 뻔한 성공 공식을 대놓고 풍자합니다.

겁쟁이 로빈 경(김재범)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성공공식을 아서왕에게 설명하는 장면. 주변 인물을 보면 눈치채겠지만 10편 가량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캐릭터들이 코러스로 등장해 웃음을 안겨준다.
사진 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겁쟁이 로빈 경(김재범)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성공공식을 아서왕에게 설명하는 장면. 주변 인물을 보면 눈치채겠지만 10편 가량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캐릭터들이 코러스로 등장해 웃음을 안겨준다. 사진 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뮤지컬의 원작인 '몬티 파이톤의 성배'에는 아서왕의 전설 속 여주인공이 한명도 등장하지 않지만 뮤지컬에선 유일한 여성으로 '호수의 여인'이 등장해 큰 웃음을 안겨준다. 그럼 아서왕의 부인인 기네비아는? 호수의 여인(구원영)과 아서왕(박영규)이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 비밀도 함께 풀린다.
사진 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뮤지컬의 원작인 '몬티 파이톤의 성배'에는 아서왕의 전설 속 여주인공이 한명도 등장하지 않지만 뮤지컬에선 유일한 여성으로 '호수의 여인'이 등장해 큰 웃음을 안겨준다. 그럼 아서왕의 부인인 기네비아는? 호수의 여인(구원영)과 아서왕(박영규)이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 비밀도 함께 풀린다. 사진 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최고의 압권은 뮤지컬에 성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에 대해 로빈 경(김재범)이 아서왕에게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원작에서 이들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산업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으로 묘사됩니다. 이 노래를 할 때 배경음악으로 유대인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지붕위의 바이올린'이 깔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 공연에서는…. 음, 누구로 바뀌었는지는 공연장에서 확인하세요.^^

마지막으로 이 뮤지컬의 제목은 왜 스팸어랏일까요. 영문학에서는 비슷한 발음을 활용한 익살스런 말장난을 펀(pun)이라고 합니다. 몬티 파이톤의 TV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바이킹들이 "우리는 더 많은 스팸을 원해"라고 노래를 부르며 사방팔방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스팸에 깔려 허우적거리는 것입니다. 뮤지컬에도 이 장면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요즘 많이 쓰는 '스팸메일'이란 표현이 이 촌극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스팸어랏의 영어 원제는 'Spamalot'입니다. 띄어 읽으면 '많은 스팸'이란 뜻의 'Spam a lot'의 의미도 지니지만 아서왕의 성인 캐멀럿(Camelot)과 유사한 발음의 '스패멀럿'이 돼 '스팸으로 가득 찬 캐멀럿'도 됩니다.

5만~10만 원. 2011년 1월2일까지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전아트센터. 02-766-6007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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