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하정규]축구화를 신고 싶은 소년들의 ‘맨발의 꿈’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6월 28일 14시 52분


코멘트
왜 우리는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그 이유 중 하나는 모든 스포츠가 철저한 물리의 법칙에 지배되는 특성 때문이다. 즉, 공을 차고 달리고 골을 넣는 데는 어떤 꼼수나 잔꾀가 통하지 않으며 오로지 땀과 노력과 의지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래서 국적이나 피부색, 지위나 재산에 관계없이 노력하는 자가 승리할 수 있고 기적적인 승리들이 가능하다.

FIFA 랭킹 40위권의 한국이 월드컵 사상 첫 원정 16강에 오른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요즘, 때맞춰 개봉한 '맨발의 꿈'은 동티모르의 오지에서 가난한 소년들의 축구의 꿈을 이뤄낸 한국 코치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 축구화를 신고 싶은 소년들의 꿈

한국 프로축구팀의 선수 출신인 김원광(박희순 분)은 인도네시아를 떠돌며 여러 가지 사업에 손대다가 말아 먹고 마지막으로 시도하던 악어 잡이 사업에서도 낭패를 본다. 우연히 만난 특파원 여기자로부터 21세기 첫 신생독립국인 동티모르에 대해 알게 돼 이 새로운 나라에서 새 출발을 해보려고 동티모르에 도착한다.

오랜 식민지배와 내전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전기와 수도도 수시로 끊기는 가난한 환경에서 동티모르의 아이들은 거리를 떠돌며 외국인들에게 '1달러'를 구걸한다. 이곳에서 기대했던 커피 사업은 또다시 사기꾼을 만나 시작부터 좌절되고, 귀국을 종용하는 한국대사관 직원과 옥신각신하던 와중에 맨발로 열심히 축구를 하는 소년들을 발견하면서 그는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이렇게 가난한 나라에서 축구화가 팔리겠느냐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동티모르 최초의 스포츠용품 사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결국 파리만 날리는 신세가 된 그는 궁여지책으로 아이들에게 축구화를 먼저 임대해주고 매일 1달러씩 갚게 하는 이른바 '축구화 임대업'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 '푸어'(poor)한 영어와 현지어, 일본어의 말잔치

이 영화는 한국 출신의 코치가 오랜 식민 지배와 내전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유소년 축구단을 구성해 히로시마 국제대회에서 6전 전승으로 1등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감동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감동만 강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독특한 유머를 바탕으로 관객들을 시종일관 웃기는데, 특히 '작전' 등의 영화에서 조폭 역할을 맡았던 박희순은 매우 '푸어'한 영어실력으로 영어와 한국어를 결합한 독특한 콩글리시를 선보인다. 나아가서 '낭숭낭숭(바로바로) 패스해서 크로스 해야지 뭐하니?' 하는 식으로 현지어인 인도네시아어와 영어, 한국어를 결합한 독특한 말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사실 최근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항상 이 '콩글리시'가 유머소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영화는 그 궁극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자동차 렌트와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김원광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본인이 등장, 일본어까지 섞여들면서 국적을 초월한 말잔치는 시종일관 관객에게 흥밋거리를 제공한다. 여러 조연들이 등장하지만 특히 이 일본인의 연기는 단연 돋보이고, 김원광과 돼지를 걸고 축구 내기를 하게 되는 잘생긴 동티모르 청년의 연기도 괜찮은 편이다.

현지에서 길거리 캐스팅되었다는 소년들의 연기력도 괜찮지만, 소년들의 깊이 있는 대화 내용이 부족한 점은 아쉽다. 도입부의 어색함과 억지스러움이 거슬리지만, 김원광이 본격적으로 축구팀을 구성하는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프로선수가 되고 싶은 아이, 덩치가 작아서 축구부에 들어오지 못하는 아이, 축구팀 내의 갈등까지 적절히 뒤섞임에 따라 동티모르 대표팀 최초의 유소년 축구단의 모습은 점차 현실감을 얻게 된다.

특히 스포츠 영화가 많이 제작되면서 수준이 높아진 운동경기 장면의 묘사는 뛰어나고, 현지 음악과 팝송 등이 어울린 영화 음악도 나무랄 데가 없다. 히로시마 국제대회 경기 내용은 휴대전화를 거쳐 본국에 라디오로 중계되고, 동티모르인들의 관심과 응원의 목소리가 높아진 가운데 마침내 최초의 동티모르 유소년 대표팀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 깊이 없는 주인공 캐릭터의 아쉬움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점은 주인공 김원광의 깊이 없는 캐릭터다. 박희순은 시종일관 너무 껄렁껄렁하고 건달스러운 연기만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주인공 캐릭터에 대한 깊이 있는 설정이 부족한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 이런 영화에서는 다소 불량했던 주인공이 축구를 사랑하는 순수한 소년들을 만나서 축구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느끼는 심리적 변화가 핵심이 된다.

그러나 박희순의 연기는 건달 이미지로 관객도 웃겨야 하고 감동도 줘야 하는 주인공의 복잡한 성격 규정에서 적절한 중심점을 찾지 못한 느낌이다. 즉 때로는 건달 같고, 때로는 심각해야 하고, 때로는 관객을 웃겨야 하는 캐릭터의 성격 자체가 깊이가 없다 보니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여기자와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도입부에서 주인공의 실패담이 구체적으로 나왔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이 영화의 깊이를 깎아 먹었다.

많은 영화에서 감초 역할을 해온 고창석이 연기한 대사관 직원의 캐릭터도 그렇다. 이 캐릭터도 영화 전개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과거 다른 영화에서의 캐릭터만 빌려온 것일 뿐 이 영화에서의 구체적 깊이가 없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중반부까지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들이 많은 점도 거슬린다. 악어 잡이를 떠나면서 시종일관 건들거리는 주인공, 동티모르에서 처음 안내를 맡은 사람이 사기꾼으로 들통 나는 장면, 스포츠용품점을 너무 쉽게 열고 기대에 들뜨는 장면, 축구화 값을 갚기 위해 자신이 기른 닭을 가져온 아이를 보고 주인공이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 등이 그렇다.

이 영화는 유독 원거리에서 망원렌즈를 활용해 가슴높이에서 잡은 샷들이 많은데, 이런 샷들은 영화의 현실감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영화 도입부에서 중반까지 너무 남발된 듯하다.

▶ 재미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깊이와 현실감 떨어져

'맨발의 꿈'은 감동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유머와 재미, 스포츠가 줄 수 있는 감동을 함께 선사하려고 했다. 잘된 부분도 많지만 전체적으로 균질하지 못한 장면들이 아쉽고,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는 강박에만 빠진 듯한 깊이 없는 주인공의 캐릭터가 내내 아쉽다.

이번 2010 남아공 월드컵은 지난 밴쿠버 겨울올림픽에 이어서 한국스포츠의 저력을 다시 한번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스포츠에서 영원한 강자는 없다. 자칫 자만하는 순간 어떤 강팀이든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이번 월드컵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한류나 한국 영화의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날로 세계화되는 환경에서 더욱 좋은 한국영화들의 등장과 선전을 기대해 본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