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 빼앗는 죄”→“약자인 여성 보호”→“性, 법이 통제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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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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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했다” 법 탄생서 종말까지

《1955년 10월 14일. ‘청교도 판사’로 불리던 김홍섭 서울고법 부장판사(1965년 작고)는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당시 26세)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해군 대위를 사칭하며 1년 남짓한 동안 고위 관료의 딸, 명문대 학생 등 70여 명의 여성을 농락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박인수에게 적용된 죄명은 혼인빙자간음죄였다.

김 부장판사는 판결문에 “동란(6·25전쟁)을 계기로 범람한 퇴폐풍조가 예속과 절도의 감성을 마비케 하는 상황에서 민족과 국가의 건전한 발전과 성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입법정신에 의거할 때 박 씨의 행위는 유죄”라고 적었다. 성 개방 풍조를 엄단해야 한다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성개방에 순결의식 약화… 90년대이후 폐지론 확산
법 감정도 빠르게 변화… 유죄판결 작년 10명도 안돼


혼인빙자간음죄는 박인수가 처벌받기 2년 전인 1953년 형법 제정 때 만들어졌다. 통일되기 전 서독의 형법에 있던 사기간음죄가 그 모태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러나 정작 서독은 1969년 이 조항을 폐지했고 터키, 루마니아 등만 이 법으로 처벌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에는 혼인빙자간음죄가 없고, 간통죄는 1974년 폐지됐다.

박인수 사건 이후에도 국내에서는 정치인 대학교수 연예인 소설가 등 유명인사들이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를 당하거나 처벌을 받으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 1990년대 들어 폐지론 본격 대두

혼인빙자간음죄 폐지가 공론화된 것은 전통적 순결의식이 약해지고 성 개방 풍조가 급속히 확산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다. 혼인빙자간음죄가 생긴 때만 해도 순진한 여성을 결혼 약속 등 거짓말로 꾀어 순결을 빼앗는 것은 ‘죄’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여성에게 처녀성을 요구하는 것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혼인빙자간음죄는 꾸준히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이런 사회인식의 변화를 반영해 법무부는 1992년 6월 혼인빙자간음죄를 폐지하고 간통죄의 처벌 수위를 낮추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각 정당 간의 견해차 때문에 국회 본회의에 상정조차 못하고 1995년 10월 자동 폐기됐다.

거의 폐지 쪽으로 기우는 듯하던 혼인빙자간음죄는 2002년 10월 헌법재판소가 형법 304조에 대해 재판관 7(합헌) 대 2(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리면서 가까스로 되살아났다. 당시 헌재는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 혼인빙자간음행위는 제한이 불가피하고, 이 조항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려는 정당한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변화된 성문화나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한 형벌 효과 등을 고려해 이 법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며 이 조항의 폐지가 시대적인 큰 흐름이라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 위헌 결정으로 재심 청구하면 무죄

그로부터 7년 뒤인 26일 헌재는 혼인빙자간음죄에 달려있던 ‘산소호흡기’를 떼어냈다. 최근 형법 개정 논의 과정에서 혼인빙자간음죄 조항이 삭제될 가능성이 높아진 데다 이번 심판 사건에서 여성 인권 문제의 주무부서인 여성부가 “피해자를 여성으로 한정한 것은 여성을 비하하는 것”이라며 폐지 의견을 낸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재판부는 이날 “개인의 행위가 도덕률에 반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사생활에 속하고 사회 유해성이 없거나 법익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없는 경우에는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사생활의 비(非)범죄화 경향이 현대 형법의 추세”라며 “세계적으로도 혼인빙자간음죄를 폐지하는 추세”라고 밝혔다.


소급 효력… 재심땐 무죄 판결-형사보상금 받을수 있어

형벌에 관한 법률이 위헌결정이 나면 그 이전에 내려진 판결에도 소급해 효력을 미치기 때문에 1953년 이후 혼인빙자간음죄로 처벌받은 이들은 모두 재심을 청구하면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고 벌금도 돌려받는다. 검찰은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에 대해선 공소취소 결정을 내릴 예정이며, 수사가 진행 중인 고소사건은 무혐의 종결 처리할 방침이다.

하지만 수혜를 입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도 법원과 검찰이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왔기 때문에 매년 이 죄로 고소된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기소되거나 유죄판결을 받은 사례는 극히 적기 때문이다. 대검찰청 등에 따르면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된 사건은 2007년 585건, 2008년 556건이지만 이 중 기소된 사람은 2007년 33명, 2008년 25명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유죄판결을 받은 경우는 매년 10명이 채 안 된다고 한다. 법원은 유부남이 미혼이라고 속이거나, 동거를 하면서 다른 여자와 결혼한 경우 등 혐의가 확실한 사건에서만 유죄를 선고해왔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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