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영균]농업개혁은 ‘親서민’ 아래 묻히나

  • 입력 2009년 8월 20일 20시 42분


3월 뉴질랜드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농업개혁을 역설했다. 이 대통령은 “한국 농촌은 여전히 정부 지원을 받아서 하고 있는데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며 “정부보조금을 없애 자율적 경쟁력을 살려낸 뉴질랜드와 네덜란드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해 보조금 삭감이나 철폐와 같은 조치가 예상됐었다.

햇사레와 제스프리의 성공모델

하필 뉴질랜드에서 농업개혁 발언을 한 것은 보조금을 철폐하고 농업강국이 된 나라가 바로 뉴질랜드이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의 농업보조금은 한때 농가소득의 최고 40%나 됐다. 1984년 경제위기를 맞아 뉴질랜드 정부는 과감한 농업보조금 삭감 조치를 폈다. 이후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농산물이 뉴질랜드 키위다.

보조금 삭감으로 위기에 처한 키위 농가들은 수출용 브랜드를 만들었다. 뉴질랜드에서 수출하는 모든 키위에는 제스프리 상표를 붙이고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한 마케팅 활동을 벌였다. 해외 마케팅을 전담하는 제스프리 인터내셔널의 주주로 3100여 개 키위농가들이 참여했다. 농민들은 키위를 납품하고 배당금도 받는다. 키위농가의 성공 사례는 정부보조금이 없어져도 농민 스스로 브랜드를 만들고 시장을 개척하면 얼마든지 활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는 어떤 농산물 브랜드가 있을까. 가장 값나가는 농산물 브랜드는 ‘햇사레복숭아’로 954억 원의 가치를 지녔다고 한다. 임금님표이천쌀, 횡성한우, 철원오대미 등이 그 다음으로 꼽힌다. 박성호 농촌진흥청 연구사와 김완배 서울대 교수는 지난달 농업경제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최고가 브랜드로 선정된 ‘햇사레복숭아’는 경기 이천시 장호원읍, 충북 음성군 감곡지역의 농민들이 만든 고유 브랜드다. 2002년 10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된 후 서울 여의도 국회와 각지에서 FTA 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질 때 이곳 농민들은 브랜드를 만들어 대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시 한-칠레 FTA의 영향으로 과일농가들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됐다. 칠레는 ‘과일 강국’이다. 그러나 공동브랜드를 띄우고 6년째인 올해 햇사레복숭아 매출은 522억 원으로 2002년 249억 원의 2배 이상이 됐다. 생산량도 7422t에서 1만4668t으로 늘었다. 공동브랜드가 없을 때는 중간상에게 제값을 못 받고 넘겼으나 브랜드를 만든 후에는 전국 마트와 슈퍼에 고유브랜드로 직접 공급한다.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자 참여 농가도 늘어 현재 2176개 농가가 ‘햇사레복숭아’라는 브랜드를 쓰고 있다. 과일농가들을 망하게 할 것으로 예상됐던 FTA가 오히려 복숭아 농가를 살리는 자극제가 된 것이다. 복숭아와인 같은 가공식품을 개발하고 해외시장 개척에도 나설 계획이다. 햇사레 공동법인 이용연 대표는 “중국의 고소득층 시장을 겨냥해 수출을 추진하고 가공식품 개발에도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농산물 브랜드 키워야 개혁도 성공

햇사레복숭아와 제스프리는 수천 농가가 참여해 공동으로 마케팅과 광고를 하고 품질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차별화된 브랜드는 기업에 소중하듯 농민에게도 귀중한 자산이다. 정부는 시군마다 매출 1000억 원대의 유통회사를 만든다는 청사진을 갖고 있다.

이런 계획서를 농림수산식품부 서랍 속에서 썩히지 않으려면 3월 뉴질랜드에서 이 대통령이 꺼낸 농업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정부는 우루과이라운드에 따른 손실 보전 등에 42조 원을 투입한 이후 2007년까지 무려 124조 원의 세금을 농업 지원에 퍼부었다. 지금 농업개혁을 단행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어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농업개혁이 친(親)서민 중도실용 정책노선과 어긋난다고 여기는 걸까. 이 대통령이 뉴질랜드에서 농업개혁을 강조한 지 반년이 다 돼 가지만 아무 소식이 없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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