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문재완]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

  • 입력 2009년 8월 19일 02시 56분


정치라면 인상부터 찌푸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우리 정치는 4류”라고 평가한 지 14년이 흘렀지만 정치는 여전히 퇴보하고 있다. 정치가 갈등을 해결하고, 국민을 통합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오산이다. 더욱 큰 문제는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잘하고 있는 다른 부문까지 망치는 데 있다.

최근 두드러진 현상은 정치문제가 사법부로 넘어가 사법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미디어법 문제를 보자. 7월 22일 국회에서 벌어진 일은 온 국민이 알고 있다. 국회의장석을 점거하려는 한나라당 의원들과 그곳을 탈환하려는 민주당 의원들의 몸싸움, 그 와중에 절차상 실수를 범한 국회부의장과 그걸 보고 좋아하는 민주당 의원들. 초등학교 반장선거보다 못하다는 세간의 혹평이 무색하지 않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날 이후 행태다. 사고는 자기들이 쳐놓고 수습은 사법부에 떠넘긴다. 민주당 등 야당의원 92명은 국회의장을 상대로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고, 한나라당은 민주당 의원을 업무방해죄로 형사고발했다.

‘국회 권한 존중’이 헌재 결정

권한쟁의심판이란 국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상호 간에 권한의 존부(存否) 또는 범위에 관하여 다툼이 있는 경우 헌법재판소에 그 판단을 맡기는 것이다. 이번에는 국회의장과 민주당 국회의원들 사이의 권한 다툼인데 그 논리가 참 희한하다. 민주당 의원들이 미디어법을 심의하고 표결에 참여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 그래서 그들은 회의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출석한 것으로 인정되면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 요건 미비로 재투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당 의원들은 권한쟁의심판을 내면서 자신들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이 침해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음 번 회기에 방송법 개정안이 상정되면 심의·표결하려고 하는데 이번에 법이 통과돼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논리다. 그동안 행태를 보면 진정성이 있는 주장인지 의문이다. 정말 심의·표결할 의사가 있다면 한나라당에 국회를 열어 정상적으로 표결처리하자고 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 사건은 정치권이 해결하는 것이 옳다. 정치의 사법화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행히도 반복되고 있다. 2005년 12월 사립학교법 개정 때 모습은 이번 방송법 개정의 판박이다. 여야 공수 교체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국회의장석을 둘러싸고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들은 그 자리를 뺏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다. 대리투표 논쟁도 있었다. 법은 통과되었고, 한나라당은 헌법재판소를 찾았다.

“국회의장석 주변을 점거하고 있던 의원 20여 명은 표결이 끝날 때까지 의석으로 돌아가지 않아 이들 중 다수가 투표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표결 결과 154명 재석에 찬성 140명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이들 중 다수가 대리투표를 하였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다.” 당시 한나라당의 권한쟁의심판청구서의 일부다. 이번 민주당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2008년 4월 헌법재판소는 이 청구를 기각했다. 그 이유는 ‘국회의장이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실관계하에서 진행한 의사절차 행위는 그것이 헌법이나 법률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이라고 인정되지 않는 한 다른 국가기관은 이를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법리는 이번 사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국회의 방송법 통과에 절차상 잘못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잘못이 법 개정을 무효로 할 만큼 중대하고 명백한 것인지의 판단 문제만 남는다.

오늘날 정치의 사법화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사회가 민주화되고 권력이 분권화되면서 권력 간 다툼이 생기고, 그 해결을 중립적 권력인 사법부가 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사법의 정치화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사법부의 판단이 정치적으로 이루어지면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지고, 법치주의가 붕괴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사법부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판단을 흩뜨리는 세력의 발호를 차단해야 한다.

헌재 압박하는 세력 차단해야

안타깝게도 이번 방송법 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람이 꽤 있다. 다음 아고라에서는 ‘미디어법 날치기 무효 판결 청원’이 벌어지고 있고, 보수신문의 광고 불매운동을 진행하는 단체는 “헌재는 여론을 철저히 의식한다”고 외치며 이 청원을 지지하고 있다. 민주당의 장외투쟁 역시 여론을 동원해 헌재를 압박하고자 하는 의사가 엿보이고, 민주당을 지원하기 위하여 모인 공동변호인에 포함된 변호사가 225명에 이르는 것도 세(勢) 과시 측면이 크다.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을 보존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일까. 묵묵히 지켜보는 국민에게 기대한다.

문재완

객원논설위원·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moonjaew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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