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유혹의 정치심리학

  • 입력 2009년 6월 21일 19시 59분


“PD수첩은 잘못이 드러났는데도 공정한 보도라고 주장하며 언론탄압이라는 감정적 호소에 치우치고 있다.”(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모임)

“현 정부는 언론을 억압하고자 혈안이고, 인권과 민주주의 수호자여야 할 검찰은 부화뇌동하고 있다.”(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우리는 과연 이성적인가

똑같은 MBC PD수첩 사태를 놓고 정반대의 견해가 춤춘다. 시변은 우파를, 민변은 좌파를 대변한다. 법을 다루는, 그래서 가장 논리적이어야 할 변호사들마저 “네가 틀렸다” 정도가 아니라 “너는 나쁜 놈”이라고 외치는 형국이다. 평소 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 맞나 따지기 전에 인정하고 넘어갈 게 있다. 좌파와 우파는 다르게 볼 뿐 아니라 다르게 ‘느낀다’는 사실이다.

뉴욕타임스의 니컬러스 크리스토프가 칼럼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코미디 프로에서 아버지의 뺨을 때리라는 주문이 나왔다. 아버지도 허락했다. 당신 같으면 하겠는가?”

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좌파적이라 할 수 있다. 도저히 못하겠다면 우파에 속한다. 우파는 세상을 지켜온 권위와 질서,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중시하는 반면 좌파는 권위 대신 평등을, 개인 아닌 사회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냥 각기 다른 게 아니라 상대 쪽에 도덕적 문제가 있다고 믿고 타도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윤리 도덕이 언제 어디서나 누구한테나 똑같이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는 아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이다. 우리 뇌에서 도덕적 판단을 관장하는 중막의 전두엽 대뇌피질은 이성 아닌 감정을 다스리고 있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는 결정은 심사숙고 아닌 재까닥 느낌에서 온다. 수렵채집시대 적의 그림자가 느껴질 때 진짜인지 한참 따지다간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성 아닌 감정 직관 느낌이 더 세고 생존에 유리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 유전자 때문이든 환경 때문이든, 세상엔 밥만 먹곤 못 사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공산제국이 무너져도 좌파이념은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고 믿지만 북한 김정일 집단과 등을 맞댄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차라리 좌파진영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자다” 커밍아웃하고 선거를 통해 집권하는 사회민주주의를 하겠다면 난 박수칠 수 있다. 그런데 간판마다 민주를 내걸고 폭력으로 정부 전복을 꾀하면서 자기네만 옳다고 감정을 자극하니 환장하겠다.

마음을 잡는 쪽이 이긴다

사람이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처럼 ‘순수한 사실’은 존재하기 힘들다. 같은 사안을 놓고 다른 시각으로 해석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PD수첩이 정권에 대한 적개심에 국기(國基)를 뒤흔들었다고 보지만 사소한 실수를 빌미로 탄압받는다고 보는 쪽도 완강하게 존재한다. 좌파 대통령이 경제를 탄탄히 키우고 빈곤층까지 줄여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브라질에 대해 좌파 매체인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종속만 심해졌다”고 비판할 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랄 수 없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지 계속 헷갈린다면, 어느 쪽이 참이라고 볼 때 결과가 어떨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수 있다. 미국 칼텍의 레오나르드 로디노 교수는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스스로 삶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더 만족하고 성취한다”고 했다. 내가 암만 애써도 사회가 잘못돼 나는 이 모양이 됐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잘 성공한다고 하긴 어렵다.

개인이야 실패해도 불행한 개인사에 그칠지 모른다. 나라 운명을 책임진 정부는 다르다.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일만 잘해서 성과로 말하면 된다. 대통령은 턱도 없다. 이 정책, 이 노선이 옳다고 논리적 근거를 대며 끌고 가도 안 먹힌다. 이성보다 감정이 힘센 인간세상에선 어떻게든 국민의 마음을 얻은 정부라야 전쟁도 이길 수 있다.

상대의 마음을 장악하는 과정을 유혹이라고 했다. 게으른 사람은 사랑과 로맨스를 우연에 맡기지만 정부 지지도와 정책 완수도 그렇게 놔뒀다간 재앙으로 갈 뿐이다. ‘정치적 마음’을 쓴 언어인지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감정적으로 유혹하는 스토리로, 도덕적으로 어필하는 정책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라”고 조언해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 승리에 일조했다.

지금 이 정부에 필요한 건 유혹의 정치다. 좌파가 증오와 분노를 건드린다면 우파는 진심과 애국심으로 마음을 두드려야 한다. 유독 격정적인 우리 국민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장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음을 말로, 행동으로 보여야 정권도 살고, 나라도 산다.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었던 그때 그 절박함을 벌써 배불러 잊었다면, 이 정부엔 희망이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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