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10년 굶은 TK 잡식성 인사

  • 입력 2009년 5월 25일 02시 51분


남자들은 좋겠다. 처음 보고도 출신지역이나 학교가 같으면 금방 의기투합한다. 여자들은 암만 오래 만났어도 어느 여고를 나왔는지 모르는 수가 많다. 수렵·채집시절부터 목숨 걸고 함께 사냥을 하던 유전자가 박혀서인지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동종(同種)을 알아본다. 그래서 막강한 네트워크를 만들어 중요한 자리는 먹잇감을 잡듯 사냥한다.

금융기관까지, 작은 자리마저

석 달 전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 1년을 평가하며 장차관급과 공공기관장 등 322명의 45%가 영남 출신이라고 발표했다. 이곳 인구가 전체의 31.4%(평균 출생연도 1949년 기준)임을 감안해도 지나치다는 주장이다. 사정기관장의 경우엔 강희락 경찰청장(경북 성주) 원세훈 국정원장(경북 영주) 김경한 법무장관(경북 안동 출생) 임채진 검찰총장(경남 남해) 정동기 민정수석(경북 봉화 본적) 김종태 기무사령관(경북 상주) 등 공석인 국세청장을 빼곤 거의 영남 출신이다.

검찰 국정원 등 정부조직 후속 인사에선 영남 중에서도 대구·경북(TK) 발탁이 이어졌다. 금융기관 인사 바람이 부는 요즘엔 아예 TK가 아니면 기를 못 편다. 최근 우리투자증권 사장으로 내정된 황성호 PCA투신운용 사장은 경북 경주 출신에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얼마 전 취임한 이주형 수협중앙회 대표(경북 안동) 배성환 예금보험공사 부사장(대구) 김영기 산업은행 부총재(경북 의성)도 TK다.

관치금융 중에서도 제일 나쁜 것이 낙하산인사라고 했다.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 중엔 관치금융, 낙하산인사, 그리고 이로 인한 정경유착이 분명 들어 있었다. “금융기관이란 용어는 관치금융 시대의 느낌이 나니 금융회사로 바꿔야 한다”는 이명박 대통령 아래로 TK 중심의 관치인사가 판치다니 납득하기 어렵다.

지난 정권에서 비판의 표적이 됐던 것도 낙하산인사였다. 대통령과 지연, 학연, 코드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깜’이 안 돼도 한자리 차지하는 특권과 반칙에 ‘빽’ 없는 국민은 절망했었다. 현 정권의 인사가 과거와 다른 점도 없지는 않다. TK 독식이 윗자리에 그치지 않고 작은 자리까지, 대구 경북의 ‘본류’뿐 아니라 ‘변두리’들도 챙겨먹는 잡식성이라는 점이다. 그 자신도 TK인 한 청와대 간부가 “요즘엔 부처 국장 과장급까지 TK 파워가 작동한다. 고위직은 물론이고 일선부처 과장까지 챙기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을 정도다.

얼마 전 은행 간부로 승진한 한 TK는 “이번 한 번뿐이라는 생각에 TK 선배를 찾았었다”고 털어놨다. 왜 이번이냐면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부터 10년을 굶었기 때문이고, 왜 한 번뿐이냐면 한나라당(또는 친이명박계)이 재집권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란다.

이 나라가 당신들 것인가

“깨끗해요”를 외쳤던 좌파정권에서도 낙하산이 보통이었으니 우파정권이 낙하산 투하 범위를 확대하는 건 일도 아닐지 모른다. 농경문화, 유교문화권인 우리만의 현상이랄 수도 없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패거리 낙하산(cronyism)은 모든 나라에 다 있다”고 했다. 다만 그래도 되는 자리와 절대 안 되는 자리, 충성스러운 낙하산과 탁월한 인재의 자리 균형은 맞춰야 탈이 덜 난다는 지적이다.

모든 나라와 민족이 다 그런대도, 과거 정권이 다 그랬대도 이 정부만은 TK 인사에 골몰해선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첫째,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내각으로 출범해 초장부터 민심을 잃은 아픈 전력 때문이다. 그러고도 TK 인사를 계속하면서 “능력대로 썼는데 알고 보니 TK더라”고 한다면 떠나간 민심을 되돌리기 어렵다. TK가 아니라는 이유로 물먹은 사람들의 원망만 쌓일 뿐이다.

미국 밴더빌트대 데이비드 루이스 교수는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낙하산인사를 연구한 끝에 “그들의 학벌이 더 좋고 유능하더라도 정책수행 결과를 평가해보면 일반 관료들이 더 우수하다”고 발표했다. 얼마간 있다 떠날 그들보다는 일반 관료들이 정책 전반을 길고 넓게 보는 까닭이다. 설령 공무원이라 무기력하다고 해도 정치적 목적으로 정책을 휘두르는 낙하산인사보다는 낫다.

둘째는 현 정부가 나라의 명운을 걸고 완수해야 할 경제개혁을 위해서다. 공공기관, 금융기관 선진화를 아무리 강조해봤자 알짜는 TK끼리 해먹는 판국에 “맞다! 해보자!”는 호응이 아래에서 일어날지 의문이다. 비정규직 기간 연장 등 나라와 민생을 위해 필요한 개혁까지 물 건너갈까 두렵다.

셋째, 우리가 애써 지켜온 민주주의가 이렇게 흔들려선 안 된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이유다. 민주주의가 완전히 정착하려면 한 세대(30년)가 지나거나 평화적 정권교체가 적어도 두 번은 이뤄져야 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우리는 이제 간신히 두 번째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TK의 이기심이 망국적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하늘이 두 쪽 나도 정권을 바꾸자’는 역심(逆心)을 부른다면 역사에 죄가 될 수도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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