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아파트 분양도 경영이다

  • 입력 2009년 5월 25일 02시 51분


아파트 청약 창구에 사람들이 몰린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미분양에 짓눌려 허덕이던 주택건설업계에 모처럼 활기가 감돈다. 인천 청라지구에서 높은 경쟁률로 분양을 마친 업체들은 여세를 몰아 다른 지역에서도 아파트 분양에 나설 태세다. 이런저런 이유로 ‘청라 특수(特需)’에 편승하지 못한 업체들은 청약 미달이 겁나 밀쳐뒀던 분양계획서를 서랍에서 다시 끄집어냈다.

침체의 골이 워낙 깊었던 터라 ‘청라의 대박’은 더욱 값지게 느껴질 것이다. 일자리 하나가 아쉬운 처지에 고용파급 효과가 큰 주택건설 경기가 살아날 조짐을 보이는 것은 어느 경기지표의 호전보다도 반가운 소식이다.

그렇다고 자축하거나 자랑하기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건설업체가 청약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고 적절한 가격전략을 세워 거둔 성과인지가 분명치 않다. 늘 해오던 식으로 했을 뿐인데 주변 여건과 우연히 맞아떨어진 결과라면 ‘일회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청라지구의 높은 청약 경쟁률에 주목하면서도 그 성공을 흔쾌하게 축하하지 못하는 것은 업계의 체질 개선을 막는 진통제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청라지구 열풍은 구입 후 최장 3년간 전매를 허용하고 양도소득세를 5년간 면제하기로 한 정부 조치 덕분이다. 800조 원이 넘는 단기유동성 중 상당액이 고수익 투자처를 찾아 떠돌다가 분양시장으로 방향을 튼 영향도 컸다.

청라 A29블록에서 호반 베르디움 34평형 2134채를 분양한 호반건설 사례에 눈길이 가는 것은 한국에서도 ‘아파트 분양학’이 자리 잡을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땅을 사서 아파트를 분양할 때 일관된 논리를 적용했다. 해당 용지의 사업성과 전체 경제여건 등을 고려해 분양 확률을 따진 뒤 시뮬레이션 결과 초기 분양률이 70%를 넘는 데에만 아파트를 짓고, 이 기준에 못 미치면 미련 없이 사업을 접었다.

청라 A29블록 용지는 본래 다른 업체 소유였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의 부실 우려가 제기된 2007년 말 이 땅이 매물로 나오자 시세보다 싼 값에 사들였다. 투자 목적이 아니라 실제 거주를 염두에 둔 수요자를 겨냥해 중소형 아파트를 지으면 설령 경기가 나빠져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분양 사태가 유행처럼 번진 작년 9월과 12월 청라지구에서 거뜬히 분양에 성공한 2000여 채의 아파트 용지도 비슷한 방식으로 매입했다. 그 대신 분양할 자신이 없는 전주 천안 평택 등지에서는 손을 뗐다. 지난해 시공능력평가액 순위가 77위에 불과한 데도 2000년 이후 분양한 25개 사업장의 계약률이 99%에 이르고 2000억 원 이상의 현금을 보유한 것은 부침이 심한 주택시장에서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지방 소형업체뿐 아니라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며 소비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메이저 업체 중에도 미분양의 덫에 걸려 고전하는 곳이 많다. 좀 무리해서라도 아파트를 지으면 결국은 팔리더라는 ‘분양 불패(不敗)’ 신화와 작별하지 않으면 경기가 출렁일 때마다 구조조정을 강요당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산전수전 겪은 창업자의 ‘감(感)’과 부동산경기 사이클만 잘 타면 된다는 식의 ‘운(運)’에 아파트 분양의 성패를 맡기기에는 한국의 주택 소비자들이 너무 똑똑해졌다. 청라에서 개가를 올린 업체들은 감과 운이 아니라 실력으로 성공한 것일까.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