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장영희 교수를 떠나보내며

  • 입력 2009년 5월 12일 20시 47분


오늘 우리는 참 열심히 살았던 한 아름다운 사람과 지상에서 영별(永別)한다. 쉰일곱의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장영희 교수다. 장 교수의 육신은 13일 그가 봉직한 서강대에서 장례 미사를 지낸 뒤 이날 오후 부친인 영문학자 장왕록 교수가 묻혀 있는 충남 천안 공원묘지에 안장될 것이다. 장 교수는 그의 삶과 글, 불굴의 의지와 아름다운 마음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을 뒤로하고 영원한 안식처로 떠났다.

삶과 글로 위안 준 희망 전도사

올해 초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이어, 장 교수마저 참으로 안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무슨 흉흉한 일이 더 생기려고 이렇듯 소중한 분들을 하늘로 불러 가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갓난아기 때 중증 소아마비를 앓아 ‘1급 장애인’이 됐지만 온갖 시련과 역경을 넘어 대학교수가 되고,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여인에게 신(神)은 어째서 유방암 척추암 간암을 차례로 앓게 하시고 목숨마저 거둬 가시는 걸까. 신은 정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일찍 데려가시는 것이 아닐까?

장 교수가 어머니 이길자 씨(82)에게 남긴 4문장 100글자의 작별인사가 가슴을 멍하게 했다. 병상에서 노트북으로 사흘 걸려 쓴 마지막 글이라고 한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평소 나는 장 교수의 열혈 팬이었다. 밑줄을 그어가며 그의 칼럼과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와 깊은 교분은 나누지 못했다. 이런저런 기회에 서너 차례 만나 뵈었을 뿐이었다. 그의 글은 나지막했으나 목소리는 걸걸했고, 그의 글은 온화했으나 행동은 터프했다. 학생들을 끔찍이 사랑했지만 수업에 대해서만은 단호했다고도 한다. 두 번째 암이 그를 침범했을 때도 그는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고 썼다. 그는 ‘장애인 장영희’가 아니라 ‘인간 장영희’로서 존재하고, 평가받고, 살아가고 싶어 했다. 나는 그런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신뢰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장 교수를 사사했고, 그의 문하생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인생에서 되풀이해 읽는 책이 몇 권이나 있으랴. 하지만 장 교수가 쓴 ‘내 생애 단 한번’ ‘문학의 숲을 거닐다’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생일’ 같은 책은 몇 번을 거듭해 읽어도 감동이 일었다. 특히 힘들고 어려울 때 그의 책을 들여다보면서 많은 위안을 받았다. 그는 문학을 통한 희망의 전도사였다. 그래서 삶에 지쳐 있는 지인들에게 그의 책을 수시로 선물했다. 분야는 다르지만 그를 본받아 비판의 글보다는 가급적 위안과 위로가 되는 글을 더 많이 쓰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아름다운 영혼 영원히 남을 것

12일 오전 고인의 빈소에 다녀왔다.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경의(敬意)를 표하고 싶어서였다. 사진 속 그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고인이 남긴 책들과 그의 별세 소식을 전한 신문, 그리고 동아일보에 쓴 칼럼 ‘쉰 즈음에’를 새긴 동판이 빈소를 장식하고 있었다. “장 교수님 열심히 살아 주셔서 참 감사해요. 하나님 무거운 짐 지고 수고 많이 하다 떠난 그의 영혼을 따뜻하게 맞아 주세요”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서둘러 받아 본 유고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에서 그는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고 썼다. 하지만 신은 더는 그에게 살아갈 기적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영혼 장영희’는 갔지만 그의 생애와 남긴 글은 이 찬란한 5월처럼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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