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위용]‘러 新동방정책’ 적극 대응할 때

  • 입력 2009년 5월 11일 02시 57분


러시아에서 상왕(上王)으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최근 행보를 보면 19세기 제정 러시아 때 유행했던 ‘시계추 전략론’이 떠오른다. 동쪽이 막히면 서쪽으로 가고 서쪽이 막히면 동쪽으로 가는 식으로 동서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이익을 취한다는 전략이다. 러시아는 1856년 크림전쟁에서 패하면서 서남쪽 통로가 막히자 동쪽을 공략해 극동 연해주와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를 얻은 바 있다.

요즘 푸틴 총리 외국 방문이 그때와 닮아가고 있다. 그는 지난달 불가리아에서 열린 에너지 정상회담은 취소하는 대신 11일부터 일본을 방문한다. 지난해 상반기까지 석유 값이 치솟아 러시아 국부가 축적될 때 시계추 전략은 유럽과 아시아 양쪽에 잠재적 위험요소였다. 러시아가 에너지 파이프라인을 양쪽에다 깔아놓고 수출 가격을 한없이 올릴 수 있다는 우려였다.

이번에는 답답한 쪽이 러시아다. 올해 국제유가가 배럴당 40∼50달러대에 머물자 외환보유액이 2000억 달러가량이나 축났다. 재정 적자는 1000억 달러를 웃돌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외자를 유치하지 않으면 경제가 깊은 수렁에 빠질 우려가 크다.

러시아는 이미 동쪽에 있는 우방 중국과 굴욕에 가까운 거래를 했다. 중국은 외환 사정이 좋지 않던 러시아에 차관 250억 달러를 제공하는 대가로 원유를 배럴당 12달러에 도입하고 연 6%라는 높은 이자까지 챙겼다. 최종 거래가 성사되던 올해 3월 러시아 국영TV는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았다. 중국 상술이 러시아의 자존심을 얼마나 건드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정부와 시민들은 푸틴 총리 방일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대일 무역 역조를 시정할 정도의 성과를 얻어올 것”이라고 낙관론을 폈다.

제정 러시아 동방정책은 열강 간 역학관계에 따라 아시아 각국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896년 조선 국왕이 왕궁을 버리고 주한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황실이 일제와 뒷거래를 하며 조선 내정에 깊이 개입한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옛 소련의 동방정책은 북한에 위성 국가를 세울 정도였으며 지금 러시아는 남북한을 오가며 등거리 외교를 펴고 있다. 새로운 동방정책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 주목해야 하는 것도 이런 과거 전력과 지금의 자세 때문이다.

발길을 점차 아시아로 돌리는 러시아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중국과 일본은 ‘빅딜’을 서두르고 있다. 중국은 지난달 동시베리아 석유관을 다롄(大連)으로 연결하는 공사 현장에 ‘푸틴의 오른팔’로 불리던 이고리 세친 부총리를 초대했다. 일본도 얘기하기 껄끄러웠던 쿠릴열도 분쟁 문제를 꺼내며 유난히 고자세로 나오고 있다. 마사하루 고노 주러시아 일본 대사는 “영토분쟁을 다음 세대에까지 물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일본보다 많은 석유와 가스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현대자동차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짓고 있는 현지 공장도 도요타 공장보다 파급 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됐다. 한국 기업이 러시아 외자유치의 효자 노릇을 해도 한국 정부는 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물론 한국 정부가 통상 문제에 치중하다보면 6자회담 등에서 더 많은 것을 잃을 것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하지만 한국이 지금 같은 기회를 놓치면 러시아에서 ‘영원한 소국(小國)’이라는 얘기를 계속 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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