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전설 미신 주술 광기

  • 입력 2009년 4월 29일 02시 59분


2005년 1월 경남 양산에 있는 천성산에 올랐다. 등산 목적이 아니었다. 당시 이 산의 도롱뇽 보호를 주장하는 이른바 ‘도롱뇽 소송’이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4차 단식 중인 지율 스님은 생명이 위태로웠으며, 필자는 관련 기사를 처리해야 하는 사회부 차장의 위치에 있었다. 정말 터널을 뚫으면 산등성이에 있는 늪들이 메마르고 도롱뇽이 사라질까? 궁금증을 참지 못해 휴가를 내고 그 산에 간 것이다.

기자가 천성산에 오른 것은

그보다 한참 전에 필자는 환경담당 기자에게 “터널을 뚫을 경우 늪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환경단체’의 자료를 확보해 내게도 한 부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유능한 중견기자였지만 아무리 채근해도 쓸 만한 자료가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현장부터 찾은, 말하자면 ‘기자의 직업병’이 발동한 셈이었다. 그날 정족산과 천성산 정상을 거쳐 내장사 쪽으로 내려오면서 주변에 흩어져 있는 무제치늪 대성늪 밀밭늪 등을 둘러봤다. 터널 입구와 출구가 훤히 보여 터널경로도 쉬 확인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 지질학과 생태학에 문외한인 필자가 산세와 늪지를 훑어본다고 뭘 판단할 수 있을까. 사실 답사 전부터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대한지질공학회,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국립환경연구원 등 3곳이 ‘공사해도 괜찮다’는 환경영향평가를 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늪은 터널과 거리 200∼1000m, 표고 200∼500m 떨어져 있다. 그 사이는 암반층으로 늪의 물이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보고서의 관련 내용.

반면 “공사로 수맥을 잘못 건드리면 늪이 마를 수 있다”는 환경단체의 주장은 모호했다. 과연 늪과 터널을 잇는 수맥이 존재하는지, 그 사이에 투수층이라도 있는지 등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감행한 그날 답사의 진짜 목적은 ‘모르는 사실의 발견’이 아니라 ‘아는 사실의 재확인’이었던 셈이다. 필자는 지금도 스님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지만, 크고 작은 모든 소송에서 그쪽이 일관되게 패한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며칠 전 스님은 대법원에서 업무방해로 유죄 확정판결까지 받았다.

이제는 상황이 종결됐을까. 이성적으로 보면 그래야겠지만 현실에서는 아니다. 확정판결 후에도 상당수 매체나 단체는 “천성산 환경문제를 이슈화한 데는 지율의 살신(殺身)이 한몫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생명·자연의 가치’와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사회적 고뇌로 보는 시선도 여전히 엄존한다. 사실 앞에 눈귀를 막은, 엉터리 프레임이다. ‘생명 대 효율’의 갈등이 아니다. 갈등해결 및 합의도출 시스템의 미비를 거론할 일도 아니다. ‘거짓 대 참’의 대립구도일 뿐이다.

헛소문의 위력, 무기력한 사실

간혹 객관적 사실은 무기력한 반면 허황된 소문과 무책임한 군중심리가 위세를 부리는 때가 있다. 여기에 정치적 욕심이 가세하면 휘발성이 매우 커진다. 결국 진실은 밝혀지지만 긴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 불필요한 낭비와 억울한 피해를 숱하게 남긴다. 끝내 진실을 외면하려는 청맹과니들도 생겨난다. 만 1년 전 MBC PD수첩의 조작보도로 시작돼 몇 달간 ‘광기의 세상’을 만든 광우병 소동도 똑같은 구도였다. 그때도 미친 것은 소가 아닌 사람이었다.

환경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환경운동이 전설-미신-종교의식이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환경독선주의에 빠지면 스스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착각하면서 사실과 다른 주장을 펴기 때문이다”(스티븐 랜즈버그 저 ‘안락의자의 경제학’에서). 어디 환경독선주의자들뿐이랴. 저널리즘 윤리를 짓밟고도 지금껏 반성할 줄 모르는 PD수첩 제작진이나 조작 과정의 규명을 방해하고 있는 MBC노조도 꼭 그렇지 아니한가.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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