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화염병보다 무서운 ‘권리금 폭탄’

  • 입력 2009년 2월 4일 03시 01분


서울 용산 철거민 참사와 관련해 ‘경찰이 현장에 인화물질이 가득 있는 줄 알면서도 무리하게 진압했다’는 주장이 있다. 참으로 동의하기 힘든 얘기다. 그렇다면 시너와 화염병을 가지고 있으면 진압하지 말아야 하는가. 5층 건물 옥상에서 한강대교와 서울역을 잇는 8차로 한강로에 화염병과 벽돌을 던져 차량과 행인을 위협하는 상황을 그냥 방치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해서 ‘법질서를 엄정하게 세워야 한다’는 단문(短文)만으로는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재개발 과정에서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아야, 영세 세입상인이 생존의 벼랑으로 몰리는 일이 없어야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는다.

상인들 ‘폭탄 돌리기’ 휘말려

분쟁의 핵심은 권리금이다. 입주상인들이 “못 나가겠다”며 생명을 걸고 싸운 것도, 전국철거민연합이 합류한 것도 사실은 권리금 때문이다. 1000여 곳 뉴타운·재개발 사업에서 진짜 폭발물은 시너나 전철련이 아니라 소화기나 경찰력으로는 제압할 수 없는 권리금이다.

임차인들끼리 보증금의 몇 배에 이르는 거액의 권리금을 주고받는 것은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독특한 관행이다. 인테리어 등 ‘시설투자금’을 승계하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영업권’과도 전혀 다르다. 사업 인허가, 상호·상표권, 영업 노하우, 인적 자본 등 무형자산에 대한 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이론적으로 보면 권리금은 장사가 되는 상가에 대한 ‘지대(rent) 상승분’을 임차인들끼리 주고받는 성격이다. 지대는 원칙적으로 ‘임대주의 몫’이지만 상가 가치를 높인 데 대한 임차인의 기여분을 인정해 임의로 거래하는 것. 이 같은 특성 때문에 말만 ‘권리금’일 뿐 사실은 어떠한 권리도 수반되지 않는다. 이것이 핵심이다.

권리금을 지불한 기존 임차인은 가게에서 나갈 때 신규 임차인으로부터 이를 회수한다. 신규 임차인은 권리금을 지불하는 순간 새로운 피해자를 찾는 ‘예비 가해자’로 변신한다. 전형적인 폭탄돌리기 게임이다. 임차인들은 자신이 마지막 폭발을 맞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적어도 재개발의 경우엔 상당한 개발이익이 있기 때문에 건물주가 세입상인의 권리금 손실을 보전해 줄 여지가 있다. 현재 ‘3개월 치 영업이익’에 불과한 세입상인의 휴업보상금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주택 재개발에서는 세입자의 주거생존권 문제가 폭발하자 공공임대주택 등 창의적인 해법을 찾지 않았는가.

용산 재개발의 경우 재개발 승인(2008년 5월)에서 철거까지 사업이 전광석화처럼 진행되는 바람에 분쟁이 증폭된 측면이 크다. 사업 속도를 늦추면 권리금 분쟁이 크게 줄어든다.

일각에서는 “영세 세입상인 보호를 위해 권리금을 제도화하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근대적 소유권이 확립된 상황에서 이는 법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권리금 법제화란 건물주가 임대를 중지할 경우 최종 임차인에게 권리금을 물어준다는 뜻이다. 임대주가 이를 받아들일 리 없고, 그럴 근거도 없다. 국회도서관에 가면 권리금에 대한 논문이 70여 편 쌓여 있고 그중에 ‘권리금 법제화’ 주장도 없지 않지만 막상 실현가능한 방안이 제시된 것을 찾기는 힘들다. 현행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에 권리금이란 용어가 아예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 관행 없애가야

법제화가 불가능하다면 관행을 없애 가야 한다. ‘한국식 권리금’의 원조인 일본에서는 권리금 거래가 법으로 금지돼 있다. 그렇다고 우리도 일거에 철폐할 경우 기존 임차상인들이 큰 피해를 본다. 점진적인 소멸을 유도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금융실명제의 도입을 능가하는 정치적 부담을 져야 할지 모른다. 이 작업은 금융실명제처럼 명분이 선명하지도 않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대다수 상인이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폭탄돌리기에 휘말리는 잔인한 현실을 모른 척 방치하는 것은 책임 있는 정부의 선택이 아니다. 아니 비겁한 일이다.

용산 참사는 정부에 ‘권리금 폭탄 제거’라는 새로운 숙제를 던져주었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