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프라이버시의 경계

  • 입력 2009년 1월 24일 02시 56분


긴 머리를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성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가는 장면을 그린 존 콜리어의 그림 ‘레이디 고디바’. 고디바는 11세기 영국 코번트리의 영주인 레오프릭 백작의 아내였다. 열여섯 살의 어린 신부인 그는 70대 남편에게 농노에게 매기는 가혹한 세금을 낮춰달라고 호소했다. 백작은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돌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알몸의 고디바가 말을 타고 나타나자 마을 사람은 창문을 닫아걸었지만 유일하게 그를 훔쳐보았던 이가 마을의 재단사 톰이었다.

▷관음증 환자를 뜻하는 ‘피핑 톰(Peeping Tom)’은 여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남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은 것은 인간의 숨겨진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법은 사생활의 자유와 비밀을 엄격하게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요즘 우리 사회는 거대한 ‘피핑 톰 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것 같다. 매체들은 연예인 등 유명인의 사생활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영상물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대중은 비판 없이 이에 빠져든다.

▷여배우 전지현 씨의 휴대전화가 소속사에 의해 복제돼 사용됐다고 한다. 왜 소속사가 전 씨의 휴대전화를 복제했는지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다는 사실엔 불쾌감과 오싹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지도서비스 ‘로드뷰’는 현대사회에서 프라이버시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뜨거운 논란을 낳고 있다. 로드뷰는 지도를 클릭하면 해당 장소를 360도 파노라마 화면으로 보여주는 서비스지만 거기엔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사적인 모습도 따라 올라오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길거리나 광장 등 공개된 공간에선 프라이버시가 인정되지 않는다. 짧은 치마를 입고 외출할 때는 누군가 내 다리를 훑어볼 수 있다는 상황을 감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폐쇄회로(CC)TV, 휴대전화카메라, 인터넷 등 첨단 테크놀로지가 프라이버시에 관한 이런 모든 관념을 뒤집고 있다. 남녀가 한낮에 데이트할 수 있지만 이런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인터넷상에서 수없이 반복 재생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디지털시대는 프라이버시의 경계를 허물며 사생활에 대한 새로운 보호장치를 요구하고 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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