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미경]노인을 위한 나라

  • 입력 2009년 1월 21일 02시 56분


“노인에겐 힘든 세상이야. 세월을 막을 수 없어.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아. 그러기를 바라는 건 부질없는 짓이지.”

지난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오는 대사다. 연쇄살인범을 쫓는 노(老)보안관 주인공에게 한 노인은 이런 말을 건넨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부터 노인은 삶의 지혜를 가진 존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노인은 지혜로움이나 존경의 대상이기보다 무기력하고 사회에 부담이 되는 존재가 돼 버렸다.

인간 수명은 나날이 연장되고 있지만 이를 기쁘게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래 살고 건강상태가 좋은 노인이 늘고 있지만 이에 걸맞은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학자 루이스 멈퍼드가 말했듯이 ‘제 몫의 수명에 더해진 세월이 안타깝게도 잘못된 위치에 가서 붙어 있는 것’이다.

고령화사회로 진입하면서 세계 각국은 노인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7년 65세 이상 인구가 500만 명을 넘어섰다. 인구 10명 중 1명이 노인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베이비붐 세대라고 할 수 있는 1954∼63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올해부터 정년을 맞게 된다. 은퇴자가 늘어나면서 노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은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가 됐다.

사람은 제1연령기인 아동기와 청소년기에서,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청년기와 중년기의 제2연령기를 지나면, 은퇴 후 삶인 제3연령기를 거쳐, 쇠퇴의 시기인 제4연령기로 막을 내리게 된다.

사람들은 제2연령기까지 확실한 삶의 좌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제3연령기, 즉 ‘서드 에이지(third age)’는 계획 없이 맞닥뜨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한 국내 보험사가 성인 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6%는 노후에 어떤 식의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중년기 못지않게 수십 년이나 지속되는 은퇴 후 삶을 아무런 준비 없이 맞으면 불행한 노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에 쓸쓸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면 은퇴 시기, 노후 생활방식, 재정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은퇴 후에도 다른 직업이나 봉사활동으로 생산적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또 젊은 시절부터 이에 대비한 인생계획을 세우는 작업도 꼭 필요하다.

요즘 미국과 유럽에서는 ‘서드 에이지’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이 시기가 인생의 전성기가 될 수 있다는 판단하에 하버드비즈니스스쿨은 ‘후반생 학교’라는 강좌를 만들었다.

IBM 같은 대기업은 퇴직을 앞둔 직원들이 교사, 공무원 등 다른 분야로 재취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직업전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오랜 세월 회사를 위해 힘쓴 직원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이런 노력이야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은퇴하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 retire는 ‘은둔생활로 들어가다’라는 프랑스어 retirer에서 유래됐다.

그러나 은퇴가 곧 퇴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노인이 무기력한 존재로 사라지는 나라는 이들이 축적한 인생 경험과 연륜도 함께 잃게 된다.

정미경 교육생활부 차장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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